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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Sep 27. 2023

중첩상태이고 싶다

가끔씩 글을 다 써놓고, 여러 번 검수까지 마쳤지만 끝내 발행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글들이 있다. 생각에 관련된 글보단 감정에 관련된,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관해 쓴 글 중에 결국 공개를 포기한 글들이 종종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주저하게 만들었을까.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주변에서 어디서 쓰는지 물어보면 흔쾌히 알려주기로 했다. 내 글에 당당해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공개하지 못하는 글이 존재하는 것은 아직 부끄러운 마음 한켠이 남아있는 것일까. 혹은 어두운 마음이 괜히 걱정을 끼치는 게 싫은 마음일까. 고민해 보다 내린 결론은, 내 상태가 하나로 확정되기 싫은 마음이었다.


요즘 갑자기 재미가 들려서 물리, 특히 양자역학에 흥미가 생겼다. 워낙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은 학문이라 천재라 불리던 리처드 파인만도 "양자역학을 완벽히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라고 말한 양자역학을 글의 소재로 쓰는 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보면 볼수록 양자역학은 철학적으로도 매력적인 학문이다. 이런 양자역학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전자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전자의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해 설명하려면 파동의 이중 슬릿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이중 슬릿은 파동의 회절과 간섭을 관찰하는 실험이다. 파동은 근원에서 시작해서 원형으로 에너지가 퍼져나가는 형태다. 파동이 아주 작은 구멍(슬릿)을 만나면 왼쪽 그림처럼 그 구멍에서부터 다시 원형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두 개의 구멍, 즉 이중 슬릿을 동시에 통과한다면 오른쪽 그림처럼 두 개의 파동이 생긴다. 이 두 파동은 주기에 따라 높이가 비슷할 때 만나서 증폭될 수도 있고 높이가 반대일 때 만나서 상쇄될 때도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두 파동의 간섭이라 하고, 이 간섭이 벽에 닿았을 때 세기를 측정하면 가장 오른쪽 그림처럼 세기가 강한 곳과 약한 곳이 번갈아 나타날 것이다. 이를 파동의 간섭무늬라고 한다.

그렇다면 전자의 이중 슬릿 실험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전자는 퍼져나가는 에너지파가 아니라 형체가 있는 물체다. 즉, 파동이 아니라 입자다. 입자를 이중 슬릿에 쏘면 어떻게 될까. 아래 그림처럼 당연히 두 구멍을 통화하는 방향에 있는 입자들만 통과해서 벽에 부딪힐 것이다. 벽에 입자를 감지하는 장치가 있다면 단 두 군데에서만 측정이 돼야만 한다. 하지만 1927년 클린턴 데이비슨과 레스터 거머가 직접 이중 슬릿에 전자총을 쏘고 확인한 결과 파동에서처럼 간섭무늬가 생겼다. 이는 루이 드브로이가 주장했던, 입자도 파동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물질파 이론의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실존하는 물체인 입자가 갑자기 소리처럼 형체 없이 주위로 퍼져나가는 파동이 된다니, 이해가 안 가고 머리가 어지러워진다면 정상이다. 이게 말이 되냐고, 실험이 잘못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것도 지극히 정상이다. 직선 운동만 해야 하는 전자가 슬릿과 일직선이 아닌 이상한 곳에서 무늬를 그리면서 검출되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래서 과학자들은 직접 전자를 하나씩 쏘면서 어디로 가는지 관측을 해봤다. '이 친구는 아래로 가서 그대로 쭉 갔군. 이번 전자는 슬릿 옆의 벽에 튕겨지고 말았군. 이번에는 위쪽 슬릿을 통과해서 일직선으로 잘 갔군.' 하나씩 제대로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자, 신기하게도 검출기에는 간섭무늬가 아니라 원래의 직관대로의 단 두 줄만 생겼다. 즉, 전자는 우리가 보고 있지 않으면 파동처럼 행동하지만 우리가 지켜보고 있으면 입자처럼 행동했다.


이 작은 전자에 자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지켜본다고 결과가 달라지는 게 말이 되는가? 과학자들은 이러한 말도 안 되는 현상을 풀기 위해 열심히 토론했지만 결국 기존의 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에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탄생했고, 이러한 양자역학의 세계를 해석하는 여러 방식이 생겨났다. 그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해석이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을 토대로 만든 코펜하겐 해석이다. 코펜하겐 해석으로 위의 실험을 설명하자면 전자는 관측하기 전까지는 파동의 성질을 띄며 가능한 모든 곳에 확률적으로 중첩되어 존재한다. 즉, 슬릿을 통과하는 시점에도 위쪽 슬릿과 아래쪽 슬릿에 동시에 중첩되어 통과하고, 이후에도 확률적으로 일직선의 경로가 아닌 곳에도 중첩되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관측을 하는 순간 그 위치가 확정이 되고 입자성을 띠며 실체가 있는 물체처럼 행동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양자역학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안심이 되는 것은 우리만 이 해석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아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저명한 과학자들도 이 해석에 반대하며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양자역학은 잘 몰라도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한 번쯤 들어봤을 수도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이 해석에 대한 토론에서 나왔다. 재밌는 점은 원래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만든 사고실험이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중 슬릿 실험의 위쪽 슬릿이냐 아래쪽 슬릿이냐 문제처럼 양자역학의 확률적인 상태가 있을 때 이 양자를 검출하는 기기에 독약을 연결하고, 이 장치를 고양이와 함께 밀폐된 상자에 넣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뚜껑을 열어서 관측하기 전까진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 이게 말이 되냐면서 양자역학을 비판하려 했지만 오히려 뇌리에 딱 박히는 이야기와 양자역학의 비직관적임을 잘 설명하는 예시로 양자역학을 홍보하는 수단이 되었다. 아무튼 결론을 내리자면, 충분히 작아 양자역학의 영역에 들어온 미시세계의 존재들은 우리가 관측하기 전까진 여러 상태들이 확률적으로 중첩된 채로 존재한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관측하는 순간 중첩된 상태는 붕괴되며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 전자는 우리가 지켜보는 순간 어느 슬릿으로 가는지 정해진다. 선수들은 시합을 치르는 순간 순위가 정해진다. 학생은 시험을 보는 순간 점수와 등급이 정해진다. 작가는 글을 발행하는 순간 독자들에게 감정, 가치관, 생각이 정해진다. 이 관측 값들은 과연 정확한 것일까. 관측하기 전의 전자는 절반의 확률로 위나 아래 슬릿에 동시에 존재하지만 관측을 하면 둘 중 하나로만 귀결된다. 나는 이게 싫었다. 사람이라면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혼재되고 중첩되어 있다. 그 상태가 발행한 글로 인해 타인에게 관측되어 하나로 확정되어 보일 수 있다는 게, 게다가 그 상태가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다. 게다가 어쩌면 관측은 대상의 가능성을 없애는 행위일 수도 있다. 우리가 지켜보지 않으면 전자는 반대편 벽에서 슬릿과 일직선상의 위치뿐만 아니라 정중앙을 포함한 여러 다양한 위치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지켜보고 관측하면 단 두 군데밖에 가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중첩상태이고 싶다.


내 글은 과연 내 상태를 하나라도 잘 나타낸 것일까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양자역학에 중요한 획을 그은 이론 중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물체의 상태(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히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관측이란 무엇인가부터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정보는 상호작용을 토대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보는 행위는 물체에 반사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관측을 하려면 빛과 같은 어떤 다른 수단이 대상과 상호작용 후 우리와 다시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여기서 대상과의 상호작용할 때, 양자역학이 통용되는 아주 작은 세계에서는 이 관측을 위한 상호작용이 대상의 상태를 바꿔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더듬어서 물체의 위치를 알아본다고 해보자. 조심조심히 더듬는다면 책이나 키보드 같은 어느 정도 크기와 무게가 있는 물체들은 우리의 손이 닿아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서 손에 닿은 위치에 정확히 물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탁구공이나 솜털 같은 아주 가볍고 움직이기 쉬운 물체라면 어떨까. 우리의 손이 닿기 직전에는 그 위치에 있었지만 손이 닿았을 때의 충격으로 인해 이미 다른 위치로 이동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체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주 약한 방법으로 물체의 위치가 거의 변하지 않게 하면 괜찮지 않을까? 여기서는 정확도가 문제가 된다. 폭이 1m인 막대를 들고 물체에 닿았는지를 확인하는 것과 폭이 10cm인 막대를 들고 물체에 닿았는지 확인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당연히 후자가 더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전자처럼 아주 작은 존재를 탐지하려면 감마선 같은 전자기파를 사용하는데, 이때 위에서 막대의 폭에 해당하는 것이 파장이다. 파장이 짧을수록 탐지했을 때 오차가 줄어드는데, 문제는 파장이 짧을수록 에너지가 커서 물체에 더 강한 영향을 준다. 위치를 정확히 알수록 물체의 상태가 많이 변형되고, 물체의 상태를 적게 변형시키려면 위치 측정의 오차가 커진다.


글을 쓰다 보면 내 안을 천착하게 된다. 특히 내 감정에 대한 글의 경우 아주 깊고 첨예하고 들여다보게 된다. 이렇게 면밀하게 나를 분석하고 고찰하는 과정에서 마치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에 맞은 전자처럼 나는 실시간으로 변화해간다. 글을 쓰면서 감정이 치유되기도 하고, 검수를 하는 과정에서 다시 읽어보면서 또 다른 감정과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글에 쓰인 나와 글을 쓰고 난 후의 나는 그 짧은 찰나에도 글을 쓴다는 자극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 변화도 모두 글에 담으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그 변화를 쓰는 과정에서 또 변화하고 그 변화까지 쓰는 과정에서 또 변화하는 굴레에 빠진다. 물체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정확하게 글에 담을 수 없다.


이번에 양자역학을 공부하면서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을 다시 봤을 때, 그러면 상자를 열어서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면 처음의 양자의 상태도 알 수 있지만 사실 양자를 직접 측정하진 않았으니 중첩된 상태로 남아있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양자 얽힘이라는 개념이었다. 양자역학에서는 서로 상호작용이 연결되는 경우 한 입자의 작용이 얽혀있는 입자에게도 즉각적이 적용된다. 즉 고양이와 양자는 서로 양자 얽힘 상태이기 때문에 고양이를 관측하는 순간 양자도 관측된 것처럼 작용된다.


요즘 홀린 듯이 빠져서 계속 반복 재생 중인 노래가 있다. 이 노래가 갑자기 왜 맘에 들었을까 생각해 봤지만 명쾌한 답이 나오진 않았다. 그러다 최근에 내 감정에 대한 글을 쓰다가 이 노래가 좋아진 이유도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그 글에 담긴 감정과 이 노래에 대한 마음이 양자 얽힘과 같은 상황이었을 수도 있겠다. 비록 그 글은 끝내 발행 버튼을 포기했지만, 얽혀있던 이 노래는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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