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시간쯤에 미용실에 가면 머리를 두 번 감는다. 깎기 전에 한 번, 깎은 다음 한 번. 앞에 해주신 분과 뒤에 해주신 분이 다른 분이었는데, 물 온도 확인해 주시는 문장이 살짝 달랐다.
물 온도 뜨겁거나 차갑진 않으세요? 물 온도 뜨겁거나 차가우면 말씀해 주세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대답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후자가 더 좋았다. 얼마 전에 본 너덜트의 <리뷰 안 씀 자주 가는 게 리뷰임> 영상이 딱 떠올랐다. 이 영상의 주인공이나 댓글도 나랑 비슷했다. 미용실은 머리해 주시는 실력이 가장 중요해야 맞지만, 사실 어느 정도 만족하는 선만 넘는다면 머리 지압 실력(매우 중요)이나 귀찮게 하지 않는 편의성이 미용실을 고르는 척도가 된다.
타월북(좌), 고양이 와인 오프너(우)
미용실 뿐만 아니라 물건을 고를 때도 그 물건의 본질적인 목적, 즉 성능만 따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HCI(Human Computer Interaction)에서 3요소가 유용성(usefulness), 사용성(usability), 감성(affection)인데, 성능은 이 중 유용성밖에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내게 필요한 최소한의 유용성만 만족한다면, 요즘은 위의 사진처럼 감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왼쪽은 타월북이라는 수건인데, 정해진 모양대로 접어서 세로로 두면 마치 책꽂이에 책을 꽂아둔 것 같은 모습을 연출해 준다. 수건에도 두께, 부드러움, 흡수력 등 다양한 지표가 있겠지만, 심각할 정도로 닦지 못하는 것만 아니면 이렇게 인테리어적인 요소를 만족시켜주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해서 바로 샀다. 오른쪽 와인 오프너도 마찬가지. 코르크 마개만 잘 딸 수 있으면 귀여운 게 훨씬 좋지 않을까?
어떤 유튜버가 손톱깎이 리뷰를 하는 걸 봤다. 일반적인 손톱깎이보다 어떤 제품을 두고 다른 손톱깎이들보다 10~20g 가벼워서 여행 다닐 때 가방에 넣고 다니기 좋다고 하는데, 흠... 적어도 나는 여행 가방에서 10~20g 무게 차이는 느끼지 못할 것 같다. 물론 손톱깎이가 수백 그램이라면 많이 불편하겠지만, 충분히 일반적인 무게라면 가볍게 하는 것보단 다른 면에 치중하려 할 것 같다.
비슷한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바로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 그리 자기 자신에 대해, 극한으로 성능을 분석하려 한다. 스펙 과잉 시대이면서도 취준생들의 대다수가 자신의 스펙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한다. 과연 그들은 정말 지원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데 부족한 스펙이었을까. 대부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정해진 TO에 비해 가능한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그 안에서 불필요한 변별력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선택받은 건 가장 튼튼한 와인 오프너가 아니라 고양이 와인 오프너였다.
예전에 비슷한 고민을 하다가 썼던 글에 담은 내용인데, 때로는 삶을 조립 컴퓨터 견적 내는 것처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조립 컴퓨터를 직접 맞추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성능을 우선시할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잘 타협하는 사람들이다. 견적을 맞추기 전 자신의 사용 목적을 냉철히 분석하고, 딱 그 역할을 수행하기 무리 없을 정도의 성능만 맞춘다. 이후 여유 자금은 편의성, 디자인, 소음 등 다양한 영역에 투자한다. 괜히 억지로 높은 스펙으로 맞춰두면, 맞춘 돈이 아까워서 좋아하지도 않은 고사양 게임을 해보려다 돈도 시간도 버리게 된다.
불편함을 누린다는 표현이 너무 재밌었다. 힘들게 고생해서 이제 누려야 하는데, 용도를 잘못 고르면 불편함을 누리게 된다. 그렇기에 이런 과잉 스펙의 시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용도를 고민해 보는 게 아닐까. 용도라는 단어가 물건 취급이 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든다면 이런 질문으로 바꿔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되고 싶은 직업이나 직무 말고, 진정한 삶의 꿈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