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필승 코리아
나는 미국인일까, 한국인일까?
초등학생이였던 난 미국에 온지 벌써 3년차가 되었다. 미국에서의 첫 몇 년 동안은 한국 TV를 거의 보지 않았다. 하루하루 적응하며 살아가기 바빴던 것 같다.
우리 4인 가족은 일요일마다 천주교회를 다녀왔다. 내가 살고 있던 미국 중부의 시골 마을은 전체 인구 600만 명인 주(state)에 속해 있었다. 600만 명 중 약 4,000명 정도가 한국 사람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LA라는 도시는 당시, 2000년대 초반 기준으로 약 25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4,000명은 미국 전체 한인 인구 1,200만 명 중 0.003% 정도인 셈이다. 그 0.003% 안에서 100명도 안 되는 가족들이 성당에 다녔다.
한인 사회의 대부분 가정은 기독교를 믿었다. 소수의 한인들만 사는 그 시골 마을 안에서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소수의 한인 커뮤니티를 선택했다. 고립된 사회 안에서 부모님은 꽤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다. 성당에 다닌 지 한 달 만에 우리 가족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린 시절 나는 일요일을 꽤 좋아했다. 집에서 2시간, 그러니까 왕복 4시간을 걸려 가야 하는 내가 사는 주에 단 하나뿐인 한인 성당이었지만, 기도가 끝나면 행복한 쇼핑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성당 옆에 있는, 그 주에 하나뿐인 한인 슈퍼였다. 그 규모도 크지 않아 많은 분들이 다섯 시간을 들여 더 큰 한인 슈퍼들이 많은 시카고로 매달 왕래하곤 했다.
신기하게도 그 슈퍼의 주인은 우리 성당 신자셨다. 향수병이 꽤 깊었던 열 살 남짓 하던 나에게 매주 그 마트에 들어서는 설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마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희망감이 생기곤 했다.
슈퍼에 들어서면 왼쪽 구석 뒤편에 하나라는 성당 친구가 늘 앉아 있었다. 나와 동갑이던 하나는 학교 가는 시간 외에 매일 그 슈퍼 구석에서 TV를 보고 공부를 하곤 했다. 하나의 부모님 두 분 모두 그 슈퍼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과자 코너를 돌며 새우깡과 홈런볼을 엄마 카트에 넣는 루틴을 마친 뒤, 하나가 자리한 소파 옆자리에 앉아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늘 같은 미국 만화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오래 걸리시길 바라며 하나와 시간을 보냈다. 나도 모르게 그 코너에 앉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한인마트 특별 대우, VIP석이었다.
형편이 넉넉하지는 못해 늘 가격을 꼼꼼히 확인하던 엄마는 마트에서만 한 시간 남짓 시간을 보내신 뒤, 당신이 가장 좋아하시는 옆 가게로 옮기셨다. 아빠는 늘 차 안에서 남동생과 우리 모녀를 기다리셨다.
옆 가게는 바로 한국 TV 프로그램들을 모조리 녹화해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었다. 당시 미국 인터넷은 한국보다 한없이 느렸고, 당연히 스트리밍 제공자 또한 없었다. 아직 DVD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하얀 벽지만 덩그러니 남은 단조로운 인테리어 속에서, 미국에 20년도 넘게 사신 듯한 중년의 여성이 무표정하게 계산을 도와주셨다.
하지만 그 가게는 상상 이상으로 꼼꼼했다. 없는 프로그램이 없었다. 매일의 아침마당, 인간극장, 그리고 일주일 정도 늦게 방영되는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도 TV를 매우 좋아하던 엄마는 요일별로 드라마를 빌려오셨다.
그때부터였을까 — 나는 자연스럽게 한국 방송들과 가까워졌고, 드라마를 통해 한국어와 문화를 밀접하게 배워갔다. 엄마가 시청하시는 드라마들을 몰래 다 지켜보았고, 어느새 엄마 옆자리를 자연스레 차지해버렸다. 그렇게 나는 열 몇 살부터 사랑과 이별, 출생의 비밀, 빈부격차, 병마와 죽음 같은 다소 어른스러운 주제들을 내면에 담아왔다.
드라마는 나에게 치유의 통로가 되었다. 학교에서의 인종차별과 정신적 학대를 견뎌오며, 10대 초반부터 나는 나 자신을 많이 미워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게 자주 부끄러웠고, 한때는 나도 다른 미국 아이들처럼 눈에 띄지 않는 서양인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한없이 숨고만 싶었던 학창 시절 내내, 한국 드라마는 내게 숨통을 틔워줬다.
나를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친구들이 한없이 부족했던 그 시절, 고국의 배경과 문화적 이야기는 깊은 마음의 공백을 채워주고 위로해주었다. 끊임없이 나의 존재를 부인당하던 바깥세상과 달리, TV 속 한국은 나와 비슷하게 생기고, 나의 성장 배경과 닮은 사람들의 생각과 일상을 비춰주었다. 지구 반대편에는 나를 안아줄 한 민족이 있다고 늘 상기시켜주었다.
그리고 내가 보는 한국은 늘 변화하고 있었고, 성장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2000년대 초반부터 향후 20년 동안 한국은 급격한 성장을 이뤄왔고, 그것이 미디어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한류의 초입기에 나는 한국인이면서도 외국인의 눈으로 한국 콘텐츠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미디어를 통해 나는 한국을 동시에 그리워하고 동경해왔다.
감사하게도 발전의 시대에 이민을 온 덕분에, 고국의 미디어 진입로가 전 교포 세대보다 훨씬 쉬웠다. 그 덕분에 나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었다. 나의 한류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최근 BTS, 오징어 게임 등을 통해 더욱더 빛을 발하고 있다.
현재 서양에서의 한류 열풍은 미국 이민자로서의 나의 어린 시절을 보상해준다. 아무도 관심 없었던 나의 언어와 문화를 지금은 미국인들이 더 치열하게 찾아주고 열광하고 있다. 오랫동안 외면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아이로서, 현재의 한류 콘텐츠의 성장은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무시 속에서도 어렵게 비디오테이프를 빌려가며 한국의 문화와 모국어를 꿋꿋이 지켜온 모든 이방인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끊임없는 거절과 부정 속에서도 그 고집과 한국인의 지칠 줄 모르는 근성이 지금의 한국인 정체성을 만들었다. 드디어 널리 알려진 우리의 정체성은 새로운 세대의 이방인 아이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힘이 되고 있다. 미국 사회 안에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조금은 더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