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일본인, 오늘은 중국인

Verbal abuse kills. Verbal power saves.

by Rita

Go back to China!

젠장, 오늘은 중국인이 되었다.


새로운 미국 시골 동네로 이사 온 후, 어느덧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미국은 6학년부터 중학생이다. 난 늘 혼자 다녔고, 일찍 사춘기에 접어들며 친구 사귀기에 더 소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한국에선 늘 외향적이고 친구들의 반장이 되는 것을 좋아하던 나의 모습은 단 1%도 찾을 수 없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학교에서의 8시간을 버티는 것이 매일 나의 숙제였다. 해리포터의 투명 망토를 갖는 것이 늘 나의 소망이었다.


학교에서의 하루 일과 중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학 시간이 왔다. 과학이라는 과목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중학교 과학 선생님은 공교롭게도 가르침에 열정이 전혀 없는 분 같았다. 매일 수업에 15분씩 늦게 나타나셨다.


이게 다 그 15분 때문이다.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교실 안은 꽤나 조용했다. 항상 그 아이가 정적을 깨트렸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이 특이해서일까? 선생님이 출석 호명을 할 때마다 내 이름의 정확한 발음을 물어봐서일까?


“Yeon? Yawn? Yoon?”


나의 진짜 한국 이름은 영문으로는 너무 길고 어렵기에, 짧게 해서 ‘연’이라고 불렸다. 그 발음조차 어려워 모든 미국인들이 여전히 힘들어했다. 단 한 명도 처음부터 정확히 부르는 미국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 아이, 닉은 하품 시늉을 하며 늘 나를 불렀다. 나도 무시하려 여러 시도를 해보았다. 안 들리는 척, 놀림의 대상이 되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무서워 보이려 애쓰며 화난 척.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이 모든 ‘척’들은 소용이 없었다. 그 아이는 멈추지 않았으니까. 매일 15분 동안 나는 그 아이의 소음과 싸웠다.


“Go back to your country, bi***!”


나의 나라가 이곳이 되었는데, 자꾸 어디로 가라는 것일까. 도대체 어린아이가 어쩌다 혐오와 인종차별을 저렇게도 빨리 알게 되고 표출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부모 또한 가까운 어른의 영향밖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다친 것이 보여야 어린아이의 상처를 알아봐 주고, 치료해 준다. 폭행만이 타인을 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폭력 또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것처럼.

Verbal abuse kills. Verbal power saves.

나는 그렇게 1년 동안 매일 15분씩 언어폭력을 당했다. 그 과학 수업에 가야 했던 나의 1년은 나에게 큰 숙제를 안기고 갔다. 그 1년 이후로 나는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다.


우리의 잠재의식은 꽤나 강하다. 무언가를 반복해서 듣고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면, 그것은 나의 내면에 쌓이게 되고 나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나에게 좋은 말과 생각을 계속 인풋해야 하는데, 인생은 그런 좋은 환경을 늘 만들어주지 않는다. 특히 어린아이에게는 환경을 바꿀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절은 나 같은 이색인종 아시안이 그 어린 나이에 이러한 상황을 매일 겪으며 자라며, 그 사건들에 정신적 임팩트를 인지하고 있는 어른들이 거의 없었다. 아이도, 어른도 이런 상황들이 다 처음이었다.


우리가 이 고통을 겪고 견뎌내야 다음 세대의 아시안 아이들을 이해해 주는 어른이 될 수 있으니까.


매일 누군가가 나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언어를 듣다 보면, 특히나 아직 정체성이 뚜렷이 잡히지 않은 취약한 아이에게는 그 잘못된 시선과 말들이 진실로 들리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믿어버렸다, 그 빌어먹을 닉의 말들을.

나는 못생기고 키가 작은 아시안이며, 영어도 잘하지 못해서 바보 같다.
나는 중국이나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며, 미국은 내가 있으면 안 되는 곳이다.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나는 친구들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20년이 지났어도 난 아직도 이때의 숙제를 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이크로 어그레션 (Microaggression)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마이크로 어그레션 : 인종적 편견에 기반한 일상적이고 미묘한 차별


영어 잘하네요

이 말은 미국에서 초중고와 대학까지 다닌 나에게 늘 들린다.


넌 어디에서 왔니?

한국이라는 답이 나올 때까지 추궁한다.


나는 소속감을 위해, 온전한 미국인인 척을 하며 내가 평생 자란 주(오하이오, 미네소타 같은) 이름으로 늘 답해본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늘, '그래서 진짜 어디에서 왔냐고'이다.


그렇게 미국에서 아시안으로 살아간다는 건, 아무리 어릴 때 왔어도, 여기서 태어났어도, 늘 언어폭력과 맞서 싸워야 하며 생김새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틀에 가둬야 한다는 뜻이다.

아시안들은 다 중국인이야.
아시안이니까 공부를 잘해야 해.
아시안은 다 눈이 작고 찢어졌어.

나는 어릴 때부터, 한국에서도 보편적인 걸 싫어했다. 늘 튀고 싶었고, 다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 다름은 미국에서 오히려 날 억압시켜 버렸다. 나의 피부색이 이미 너무나 튀었고, 이 피부색은 미국에서 무조건 반감을 일으킬 거란 잘못된 믿음 때문에 늘 숨고 싶었고, 다른 미국인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섞이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생각하는 ‘아시안’이 되어버렸다.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자란다는 건, 나 자신만을 위한 올곧고 단단한 정체성을 찾아보기도 전에 그 기회가 사라진 세상에서 사는 것이다. 다시 그 기회를 잡으려면 보통의 아이보다 두 배로 노력해야 하며, 어른이 되어도 자주 혼란 속에서 살아야 한다.


나는 미국인일까?
나는 한국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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