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이 너무해

검은머리 생존기

by Rita

미국에 이민 온 지 7년쯤 되던 해,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이제 인생의 3분의 1 이상을 교포로 살아가던 중이었다. 여전히 학교 안에는 외국에서 이민 온 아시안이 없었고, 한국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욕심이 많았던 나는 학교에서 인기 있는 백인이 되고 싶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남자는 풋볼 선수, 여자는 치어리더들이 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존재였다. 나는 곧장 치어리더 오디션으로 향했다.


다행히 운이 좋게도, 처음 이민 왔을 때 초등학교에서 배워둔 기본기가 있어서 전혀 감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치어리딩만 연습해 온 선수 친구들과는 실력 차이가 상당했으며, 겨우 주니어 팀 소속이 될 수 있었다.

비록 꼴지 성적으로 팀에 입단했지만, 나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치어리더가 되었으니 이제 모두가 나를 좋아하고 관심 가져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첫 연습 날,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나에게 맞지 않는 가면을 쓰려던 욕심이었다는 것을. 미국 친구들은 공부보다는 예체능, 특히 운동에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아주 어린 나이부터 투자해왔다. 아쉽게도 나는 운동에 소질이 없을뿐더러, 보통의 한국인처럼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체력에서부터 다른 치어리더 팀원들과 큰 차이가 났고, 다른 친구들이 어려서부터 다져온 체조(gymnastics)의 기본기를 갖추지 못했다. 텀블링은 생각보다 무섭고 어려웠으며, 팀원으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따로 체조 레슨도 받았다.


그러나 노력에 비례하지 않게 실력은 늘지 않았고, 다른 팀원들도 나와 같은 조가 되는 것을 꺼렸다. 작고 통통한 아시안으로서 피해 의식을 이겨내려면 실력이 출중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망연자실하며 그 자리가 너무 버거웠다.


연습 시간 중 가장 힘들었던 때는 쉬는 시간이나, 다른 팀원들의 친목 속에 소속되지 못하는 위화감을 느낄 때였다.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내가 새로 이사 온 그 미국 시골 동네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초중고를 함께 다녔고, 많은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치어리딩을 함께 해온, 엄마들끼리도 매우 친한 사이였다. 미국 안에서도 치맛바람은 존재했다.


그런데 중학교 중간에 이사 와서(미국 이민 후 세 번째 이사), 유일한 외국인으로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려 했던 건 너무 큰 욕심이었다. 나의 한국인 엄마는 당연히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학교 선생님들과의 의사소통도 나를 통해 해야 했다. 치어리더 팀은 자주 다른 도시로 원정을 갔는데, 그때마다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백인 엄마들 사이에서 혼자 앉아 있는 엄마를 보는 것이 내가 팀 안에서 혼자인 것보다 더 힘들었다.


엄마의 보호자


회사 일로 출장이 잦고 너무 바쁘셨던 아빠는 우리의 학교 일에 잘 관여하지 못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엄마는 당신이 원하시는 만큼 집 밖에서는 우리를 돌보지 못했다. 남동생도 많이 어렸던 터라, 그나마 의사소통이 조금이라도 되는 나는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거의 내가 다 책임졌고, 알아서 헤쳐 나가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영어를 써야 하는 모든 일에 관여하며 번역가의 삶을 살았다. 우리 집에 오는 고지서들의 번역부터 병원이나 학교에 갈 때 늘 내가 그 상황의 지휘자 역할을 했고, 영어로 걸려 오는 모든 전화를 내가 받고 답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엄마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나마 두 세상(미국과 한국)을 모두 알고 있는 내가 그들을 이 외국에서 보호해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차별을 당할 때보다, 그들이 불이익과 불편함을 겪을 때 더 슬프고 안타까웠다.


나의 욕심으로 버거운 자리를 늘 함께 동반해야 했던 엄마에게 늘 미안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이 모든 상황이 늘 원망스러웠다.




빨리 잘하고 싶다는 조급함이 컸다. 결국, 무리한 텀블링 연습 끝에 팔이 부러졌다. 그렇게 한 시즌을 쉬고 2학년 때 다시 연습을 나갔을 때, 나는 또다시 친구들에게 소외되고 시니어 팀에 뽑히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단체에서 배제당하는 느낌은 이민 온 아홉 살 때부터 익숙했지만, 여전히 외로웠고 나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내 자신을 괴롭혔다. 늘 선택받지 못하는 이유를 나에게서 찾았다. 내가 더 잘하지 못하고, 내가 이색 인종이라는 사실이 문제라고 생각하며 피해 의식 속에 갇혔다. 그 불안함이 커지자 나는 스스로 시니어 팀 오디션장에 가지 않았다.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사람은 결국 제일 하수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성공인데, 그 시절의 나는 그것을 알 만큼 현명하지 못했고, 늘 최고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겠다는 어리석은 마음가짐은 소수 민족 이민자 아이에게 사치였다.


계속 넘어지고 이어 나가야 꼴지에서 90등이 되고, 2인자가 되고, 결국엔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신념과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인정해야 한다. 나의 여건은 분명히 불리했다. 그 불합리한 조건 속에서 ‘왜 나는 꼴지일까’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연습해온 출중한 미국 아이들 사이에서도 뽑혔다는 사실에 감사했어야 했다.


비록 다른 팀원들과 친하지는 않았어도, 백인 우월주의가 강한 시골 공립학교에서 금발의 백인 여자아이들로 가득한 치어리딩팀에 외국인으로서 들어갔다는 점만으로도, 20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이민자 1.5세 아시안 소녀로서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검은 머리로 백인 우월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 그 속에서 혼자 고군분투했던 내가 이제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실패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존재하며, 실패도 해보고 버텨내는 당신은 그 자체로 충분히 대견하다.

이 생존기가 필요했던 누군가가 더 이상 외롭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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