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우울증 극복하기
한참 화장실에서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미국 시골 마을 학교에서 나의 유일한 친구 요한나와 화장실에서 마주쳤다. 아쉽게도 요한나와 나의 점심시간은(3교대라서) 겹치지 않았고, 나는 혼자서 점심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요한나는 수업 중에 화장실에 온 것이었으며, 그렇게 나는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고백했다.
친한 친구에게 조차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성격에 어른스럽고 내성적인 요한나는 오히려 크게 반응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자신도 점심시간에 밥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 건조한 반응이 나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그렇게 단 한 명만 나를 이해해 줘도 인간은 살 수 있다. 요한나는 내 인생의 은인이었다.
그리고 내 은인은 요즘 점심시간에 학교 도서관에 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다만 음식 반입은 안 되기에 점심은 수업시간 중에 빨리 먹거나 굶어야 했다. 미국 고등학교 4년 중 2년 반을 화장실에서 점심을 먹은 나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소식이었다.
나는 곧장 다음 날 점심부터 도서관으로 향했다. 화장실 칸막이 안보다는, 도서관에서 보내는 점심시간이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훨씬 밝고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누적된 인종차별의 상처로 인해 청소년 우울증에 걸렸던 나를 다시 공부하게 도와주었다. 한 번도 A를 놓치지 않던 내가 사춘기와 함께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며 슬럼프를 겪고 있던 참이었다.
대학 입시 시험인 SAT 공부를 할 의욕이 없던 나에게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학교가 끝난 후에도 도서관에 가게 되면서 나는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 나의 세상에 첫 번째 등불이 켜지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며 내가 다니던 한인 천주교회에 점점 한국에서 온 또래 아이들이 늘어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녔지만, 내 또래는 세 명도 되지 않았고 모두 2세 남자 교포 아이들이어서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았다.
미국 생활에서 한인 교회 활동은 빠질 수 없는 존재다. 신앙생활은 물론, 외롭고 힘겨운 이방인들이 모여 자신들의 고단한 삶을 공유하고 의지하는 곳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인이 없는 미국 고등학교에서 할 수 없었던 사회생활을 이곳에서 할 수 있었다.
성당의 중고등부 아이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교포 아이들이거나, 한국에서 온 지 1년도 되지 않은 유학생 아이들이었다. 사실 나는 두 그룹 모두에 온전히 속하지 못했다. 진짜 나는 교포도, 유학생도 아닌 1.5세대(generation)였기 때문이다.
1.5세인 나는 한국말을 잘했지만, 미국 문화를 2세 교포들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반대로 보면 완벽한 교포 같았지만, 한국어뿐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처음엔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완전한 소속감이 없는 게 서글프고 외로웠다. 하지만 나중엔 이 유니크한 상황을 나의 강점으로 바꾸었다. 나는 미국의 많은 사회단체에서 볼 수 있는 ‘교포 vs 유학생’의 분열을 우리 성당에서 이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며 한창 신앙생활에 열심이던 나는 활발히 두 그룹 모두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당에서는 학교의 나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이 생긴 듯, 외향적이고 말도 많았다. 비슷한 인종차별의 상처를 가진 내성적인 교포 아이들에게 한국에서 온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고, 반대로 유학생들에게 교포 친구들의 장점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성당 개관부터 계신 한글학교 교장선생님 말에 따르면, 당시 30년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와 한국어를 따로 쓰는 중고등부 아이들이 함께 교류했다고 한다. 물론 이 협업이 온전히 내 덕분만은 아니었다. 당시 우리 세대 아이들 중엔 신앙심 깊고 배려심 많은 친구들이 많았다.
두 그룹을 가깝게 만든 요소는 언어였다. 나는 서로의 말을 번역하고 오해를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미국 시골에서 처음으로 ‘내 쓰임’을 느꼈다. 처음으로 존재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렇게 역할이 있는 삶을 살게 되면서 같은 한국인 친구들과 소속감을 가질 수 있었다. 나의 두 번째 등불이 켜졌다.
미국에 이민 오기 전, 아주 어린 나이부터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미국에 와서도 꾸준히 피아노를 치며 ‘내가 잘하는 게 하나는 있다’는 자부심으로 성장했다.
초등학교 때는 미국에서 많은 콩쿠르 대회에 나가 꽤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며 다른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갔고, 나와 잘 맞던 피아노 스승을 잃었다. 새 선생님과의 거리감, 외로움, 인종차별의 괴로움은 내 정신적 건강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 정신이 내 삶을 지배한다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던 피아노 연습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러다 성당에서 사귄 마음 맞는 한국 친구들과 재미로 밴드를 결성했다. 피아노로 다져온 기본기 덕분에 나는 키보드를 맡게 되었다. 학교에서 마칭밴드를 하던 조기 유학생 친구는 수준급 드럼 실력을 가졌고, 밥 먹고 기타만 치던 교포 오빠 둘은 일렉 기타와 베이스를 번갈아 맡았다. 중학교쯤 이민 와서 나와 비슷한 정서의 언니 둘은 노래를 부르며 공동 리더가 되었다.
우리는 주말마다 친구 집 지하실에 모여 연습하며 친목을 다졌다.
내 인생에서 처음 가져본 온전한 소속감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을 나누며, 나는 영원히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우정을 배웠다.
그 친구들은 나의 세 번째 등불이었다.
이렇게 세 가지 등불은 어둠뿐이던 내 어린 시절을 밝혀주었다.
도서관에서의 공부는 내가 간절히 바라던 미국 시골 마을 ‘탈출’을 도와주었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원하던 대학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자신감은 비록 친구는 없는 학교였지만 나의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
나의 정체성을 살려 한인 교포와 유학생 친구들 사이를 좁혀준 일은 내 존재의 이유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악은 그 자체로 치유였다. 음악을 함께한 밴드 친구들은 나를 더 이상 외롭게 하지 않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겪었던 지독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이 마지막 등불은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었다. 견디는 시간 끝에 결국 보상이 온다는 것을 몸소 느낀 청소년기였다.
유년기에 이민 와서 롤러코스터 같은 순간들을 지나왔다. 영어를 못하는 답답함을 느끼며, 그 누구의 보호도 없이 인종차별의 순간들을 고스란히 견뎌냈다.
지금 혹시 이러한 혹독한 환경 속을 견디고 있다면, 먼저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해 보길 권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하며 나의 장점과 단점을 알아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기적과 행운이 반드시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