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뿌듯함
부끄러움과 뿌듯함은 내게 중요한 감정이다. 이 둘은 섞일 수 없는 다른 종류처럼 보인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다. 강 씨여서 자기소개나 수행평가에서 뭐든 대부분 내가 먼저 해야 했다. 첫 순서는 기준이 된다. 나를 적당히 잘 내보여야 하는 그런 자리는 불편했다. 누군가 해준 사소한 칭찬도 어색했다. 나를 향한 비난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이겨냈던 경험은 그 어떤 순간보다 뿌듯했다.
몇 년 전 나는 큰 수술을 받았다. 휴직하고 재활을 열심히 해야 했다. 혼자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자 이것저것 운동도 시작했다. 무용은 그중 하나였다. 취미 발레라고 했지만, 수강생들은 열정적이었다. 스트레칭 시간이 되면 서로 얼마나 유연한지를 뽐냈다. 그들은 매일 바뀌는 발레복을 입고 아름다운 백조를 꿈꾸는 듯 보였다. 그러나 척추에 심이 박혔던 내 허리는 잘 구부러지지도 그렇다고 활짝 펴지지도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해준 '예전 몸과는 다르죠.'라는 말은 내가 평생을 안고 가야 할 한계처럼 느껴졌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직면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그들의 몸을 보며 질투를 느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떻게든 내 몸을 꼿꼿하게 세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1번 포지션, 플리에. 2번, 주테!” 음악이 꺼졌다.
“자기는 어깨에서 승모근이 뭉쳐있네. 자기는 종아리 힘 좀 빼고 다시 걸어봐요! 다시 1번.”
무용선생님의 말투는 날카로웠다. 그녀에겐 회원들의 그날그날 몸의 상태가 보인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걸 보고 느낀다니, 누군가는 사이비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서 얻은 능력처럼 보였다. 어떨 때는 마음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개인 수업을 받기로 했다.
그날도 정수리에서 실이 나온다고 생각하며 힘 빼고 걷는 연습을 했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무용선생님은 내게 복직하고 서울에 돌아가서 하고 싶은 것을 물었다.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대뜸 여기부터 저기까지 한번 몸으로 표현해 보라고 했다. 부끄러워서 못 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그럼 ‘부끄러움’을 보여달라고 했다. 망설이는 나를 보더니 부끄러운 감정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라고 되물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동작을 보여주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조심스러운 연인, 작은 칭찬에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찔려서 숨고 싶은 모습.’ 그런 그녀의 몸짓은 자유로워 보였고 아름다웠다. 나는 누군가 앞에서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두려웠다. 심지어 정해진 틀도 없었다. 아무런 도움도 없이 나 혼자 걸어가야 했다. 2m 남짓한 저 거리를 내 마음대로 움직여야 했다. 음악이 나왔다. 한 걸음 살짝 떼는 순간, 음악이 꺼졌다.
그 뒤 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었다. 어떻게 움직였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음악 속에서 혼자 2m를 걸었다. 반듯한 자세가 아니더라도 걸어갔다. 구부정하든 자세가 삐뚤든 어설프든 간에 내 모습을 보여주었다. 머릿속에는 어쨌든 해냈다는 생각이 가득 찼다. 선생님은 엉거주춤한 동작은 있었지만 그래도 잘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또 해보라고 했다. 그녀가 가리킨 거리는 아까보다 훨씬 멀었다. 아예 무용실 전체를 마음껏 무대로 쓰라고 했다. 나는 그때 떠오른 ‘뿌듯함’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이 전보다는 좀 더 당당하게 걸었다. 한 발로 넓게 뛰어보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위로 힘껏 점프했다. 지난 시간이 스쳐 갔다. 점프도 달리는 것도 이 몸으로 할 수 있을까 망설였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래도 이제 하나씩 할 수 있게 된 것이 고마웠다. 나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또 뛰었다. 아까보다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거침없이. 그렇게 몇 바퀴를 더 돌았다. ‘음악이 멈출 생각을 안 하네?’라는 생각과 함께 선생님을 보았다. 그녀는 무용실 한편에서 울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선생님은 나를 안아주었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오랫동안 몸에 집착했고 내 한계를 마주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가 먼저 할 수 없다고 만들었던 보호막. 요즘도 누군가의 곧은 자세를 보면 열등감이나 질투 같은 불편한 마음이 삐쭉 올라올 때가 있다. 그래도 이제는 내가 가진 몸을 너그럽게 보려고 한다. 구부정한 어깨, 움츠려진 가슴, 툭 튀어나온 거북목, 좀처럼 빠지지 않는 뱃살. 모두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수술로 인해, 서울에서 고향에서 내려와 보낸 날들도 내게 지우고 싶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멈춰버렸다고 느낀 시간 속에도 이렇게 남겨져 있는 것이 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 몸짓을 보여준 날이었다. 나는 발버둥 치며 걸어왔다. 그리고 그걸 알아봐 준 사람, 나의 첫 번째 ‘관객’에게 고맙다.
그때 서울로 다시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던 무용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연극을 해보고 싶다.'고 그녀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