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장, 주인공
작년 2월 말, 나는 이 집으로 이사 왔다. 전세대출 이자가 웬만한 월세만큼 나가지만, 방음도 잘 되고 엘리베이터도 있는 풀옵션 오피스텔이었다. 이사 온 첫날밤 나는 침대에 누워있다가 이내 다시 일어났다. 옷방문을 열었다가 닫고, 화장실 불을 켜고 괜히 변기 물을 내려보고, 주방에 가서 물도 한 잔 마셨다. 원룸에서만 살다가 투룸으로 오다니! 마치 성공한 도시 여자가 된 것 같았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새로운 집에 점차 적응했을 무렵, 나는 종종 친한 지인들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결혼한 친구들, 애기 키우는 언니들, 싱글 동생들 모두 편하게 내 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손님이 오면 지금까지 모은 여러 가지 티백을 보여주었다. 탄산수에 유자청을 넣은 유자에이드, 보이차, 드립커피, 사과 주스까지 메뉴는 다양했다. 친구들은 찻집이라는 의미와 내 이름의 성(강 씨)을 넣어 우리 집을 ‘강다방’이라고 불렀다.
집들이는 점점 진화했다. 재즈 BGM을 깔고, 네온사인으로 만든 명패를 걸어두었다. 잠깐 배웠던 타로와 사주를 해주면서 상담소를 운영하기도 하고, 에니어그램카드로 성격유형을 봐주는 시간도 있었다. 분위기 좋고 맛있는 카페도 많지만 집은 편하고 정겨웠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서로 속 깊은 고민도 이야기했다. 때로는 모두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고, 웃음소리로 꽉 채워지기도 했다. 나 역시 혼자 밥 먹고 누워있는 것보다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강다방’의 주인장이었다.
하지만 여러 명을, 그것도 직장 선배들을 초대했다. 처음이었다. 작년 동학년은 나를 포함해 7명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기피하는 6학년을 맡았고 졸업식까지 함께 달려왔다. 사실 좀 더 친해진 몇 분에게만 따로 연락하려고 했다. 그러다 누구는 빼고 누구는 초대해서 새로 톡방을 만들기도 찜찜했다.
<초대합니다>
날짜 : 이번 주 수요일 낮 2시
준비물 : 즐거운 마음, 가벼운 양손
나는 결국 학년 단톡방에 초대장과 집주소를 보냈다. ‘모레인데 시간도 촉박하고, 다들 바쁘시겠지.’ 설마 많이 오겠나 싶었다. 웬걸?! 한 분 빼고 다 오겠다고 했다. 누워서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집부터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들이 전에 집주인은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과일과 간식부터 주문했다. TV에서 화제였던 크림치즈 카나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도 장바구니에 넣었다. 화장실도 오랜만에 청소했다. 유튜브에서 알려주는 대로 세제를 물에 불려 거품을 내서 수세미로 박박 닦았다. 욕실 바닥 줄눈이랑 모서리 틈새에 핀 곰팡이도 제거하고 물때도 깨끗하게 씻어냈다. 평소에는 닦지 않았던 창틀과 서랍장 위 먼지도 닦았다. 청소기를 돌리고 또 돌려도 머리카락은 계속 나왔다. 나는 또 정리할 곳은 없는지 집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약속 날이 되었다. 거실 구석에 붙여놓은 탁자를 가운데로 뺐다. 집에 있는 의자란 의자도 다 꺼냈다. 선생님들은 하나, 둘씩 시간 차를 두고 도착했다.
도착한 손님들은 집구경을 시작했다. ‘깨끗하게 사네~’라는 말을 시작으로 몇 평인지, 구조가 어떤지, 수납장이 많다는 등 집에 대한 평가들이 이어졌다. 나는 물을 끓이고, 차를 내왔다. 여섯 개의 잔, 과일과 카나페, 학년 부장님이 사 온 치즈케이크로 테이블 위는 빽빽했다. 이 집으로 온 이래로 최다인원이 모였다. 집안은 꽉 찼다. 내 집이 처음으로 좁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되었다. 화제는 학교를 맴돌았다. 누군가 교장 선생님 퇴임식에 대한 소감을 말하고 나면 곧바로 다른 누군가가 받아서 새 학기 준비에 대해 이야기했다. 집주인은 나지만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한 번 마이크를 잡으면 놓지 않았다. 나는 에니어그램과 타로 카드를 꺼내며 ‘강다방’ 주인 행세를 하려다 참았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나는 마이크를 잡는 대신 음식이 입맛에 맞는지, 물이 떨어지진 않았는지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나는 침대에 곧장 가서 누웠다. 주인장이 이렇게 바쁜 게 원래 집들이인가 싶었다. 그동안에는 초대한 내가 기분이 더 좋았다. 집에서는 더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서로 몰랐던 취향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더 끈끈해지는 느낌이었다. 소박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음식과 공간을 준비하는 것도 즐거웠다. 친구들이 다 가고 설거지 거리는 한 더미지만 이상하게 흥이 났었다.
하지만 동료를 초대하는 건, 친한 친구를 부르는 것과는 달랐다. 어느 순간 동학년 회의와 업무의 연장선, 그 어딘가였다. 무엇보다 단체 손님을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해보고 알았다. 그래도 한 번은 대접하고 싶었다. 집들이 이후에 나를 볼 때마다 한 선생님은 “생각해 볼수록 고맙더라고.” 말해주신다. 그 말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문득,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건 내가 주인공 행세를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대장을 보내면서 나는 손님에게 공간을 내어주기로 약속했다. 나는 장소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함께 한 그 시간 동안은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사주니, 타로니, 고민상담소니, 그날의 화제니 하는 내용보다도 초대하는 사람의 마음과 함께하는 분위기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당분간은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가지고 싶다. 대규모로 사람들을 부르는 것도 조금 신중해야겠다. 마찬가지로 '강다방'도 잠시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다시 문을 열겠다. 그래도 집들이 덕분에 청소는 완벽하다! 재정비 후에 다시, '강다방'으로 모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