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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은 Mar 20. 2023

텔레비전 속 일일연속극

미워했던 마음, 그리고 남겨진 것

어릴 적 학교에서 과학상상화 대회를 할 때면 나는 큰 텔레비전을 그렸다. 작은 4개의 브라운관이 2*2로 쌓인 커다란 텔레비전. 우리 집 텔레비전을 독점했던 아빠는 뉴스, 바둑 같은 재미없는 채널만 보았다. 나도 내 마음대로 리모컨을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 엄마, 나, 남동생 네 명이 각자 이어폰을 끼고 원하는 채널을 볼 수 있는 텔레비전을 상상했다.     

 

내가 4학년이 되던 해,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들어왔고 이후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내 방에 짐을 푸셨고 곧 본인만의 작은 텔레비전을 샀다. 그녀는 채널을 돌려가면서 아침드라마, 일일드라마, 주말드라마 등 각종 드라마를 봤다. 내 방은 주인공들의 고성과 요란한 배경음악, 열혈 시청자인 할머니의 욕으로 가득 찼다. 나의 외할머니는 당신이 매일 빠짐없이 보시던 일일연속극을 닮으셨다.     




일일연속극은 매일 30분씩 방영한다. 짧은 순간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기에 불륜, 싸움, 김치 싸대기 같은 자극적인 소재가 나온다. 외할머니는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가족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는 몸에 좋다는 소리만 들으면 지갑을 열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노인정 행사에 다녀온 날에는 양손 가득히 쇼핑백을 들고 왔다. 대부분 환불도 안 되고 출처도 알 수 없는 건강식품이었다. 그녀가 샀던 전기 옥매트, 안마기와 각종 건강식품은 처치 곤란이 되어 집에 쌓였다. 


건강프로그램 정보도 혼자만 실천하시면 될 걸 꼭 이래라저래라 참견해서 문제를 키웠다. 담배 피고 오는 아빠 옆에 다가가서 ‘담배 피면 몸이 안 좋은데…’를 중얼거리는 식이었다. 본인은 혼잣말이라지만 다 들리게 말했다. 그녀는 노인정에 가서도 아는 척을 하거나 아들 자랑을 해서 다른 할머니들과 자주 사이가 틀어졌다. 


때때로 할머니는 약한 척을 하면서 관심을 끌려고 하기도 하셨다.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삭신이 쑤신다면서도 노인정과 복지회관 행사에는 꼭 참여했다. 언젠가는 동네 병원은 못 믿겠다며 서울의 큰 병원까지 가서 모든 검사를 받고 오셨다. 병원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도 몸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와 자주 부딪쳤다. 시험 기간에 공부하고 있으면 그녀는 내 옆에서 연속극을 틀었다. 나는 귀를 막고 교과서를 읽었다. 할머니는 TV 볼륨을 낮추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고, 나는 그녀에게 어떤 대사도 들리지 않도록 큰 목소리로 책을 읽었다. 


매일 반복되는 그녀의 “밥 줄까?”라는 소리만 들려도 미간을 찌푸렸고 눈에 힘이 들어갔다. “~해줄까 ?”그녀의 어미는 늘 청유형이었다. 그냥 “밥 먹어.”라고 하던가. 왜 자꾸 나에게 물어보는지, 본인이 선택하지 않고 왜 나에게 결정권을 미루는 것인지, 그런 의존성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끈질겼다. 내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자신에게 관심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무반응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화를 내는 건 나였다. “그만 물어보시라고요. 제가 알아서 밥 먹을게요. 제가 할 테니까, 해줄까? 좀 그만 하세요!” 소리 지르는 내 뒤로 그녀는 들으라는 양 “참 요상혀.”하며 중얼거렸다.


할머니에게 쏟아부었던 모진 말들은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녀를 향한 내 미움은 날카롭게 칼을 가는 것과 같았다. 칼을 갈 때마다 내 안에도 먹색 쇳가루가 쌓였다. 쌓이고 쌓여 딱딱하게 굳어진 돌덩이 같은 죄책감이 괴로워서 손을 떼고 싶다가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거나 얼굴만 보면 나는 다시 칼을 집어 들고 갈았다. 그때마다 내 마음에서는 기분 나쁜 쇳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제 나가주세요. 나는 할머니보다 엄마, 아빠 편이야.” 결국 내가 칼자루를 뽑아 들었다. 

20년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아빠가 더 이상 외할머니와 못 살겠다고 했다. 엄마는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았다. 할머니는 버티셨다. 아빠가 그러다가 또 마음을 돌릴 거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엄마는 위궤양 진단을 받았다. 나는 외삼촌에게 이제 할머니 데려가시라고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결국 우리 가족의 몫이었다. 할머니가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닌다고 했을 때가 그쯤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절박해 보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우리와 함께 살고 싶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끝날 듯 질질 끌고 이어가는 연속극처럼 그녀는 질겼다. 할머니는 등도 안 굽고 허리도 꼿꼿하고 정정하셨다. 고봉밥도 소화 잘 시키고 화장실도 매일 갔다. 그리고 갈수록 메말라가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악인을 처단하기로 했다. 내게 외할머니는 엄마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존재였다. 선악과 흑백이 분명한 일일드라마처럼 그녀는 명백히 악녀였고, 엄마는 지켜야 할 여주인공이었다. 나는 칼을 뺐다. 

    

외삼촌들은 할머니를 모셔가지 않고 집을 따로 구해주셨다. 우리 집 바로 옆 단지 아파트였다. 몇 달 사이에 할머니는 얼굴 살이 쪽 빠지고, 눈에도 힘이 없어졌다. 그리고 혼자 사신 지 1년이 채 안 돼서 돌아가셨다.  



    

일일연속극의 마지막 화는 악인들도 참회하고, 주인공들과 하하 호호하면서 마무리된다. 할머니와 우리 가족은 어떤 엔딩으로 남았을까. 우리가 같이 살지 않았다면 서로의 바닥을 모르지 않았을까?     


유독 무더웠던 2018년 여름, 할머니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오랜만에 네 식구가 함께 모여 거실에서 잤다. 나는 엄마가 걱정된다며 고향 집에 더 머무르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취방에 돌아가 혼자 자는 게 무서웠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잡고 있던 건 나였다.      


나는 독립적인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할머니처럼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른이 되기 싫었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 나 역시 사람들의 관심을 좋아하고, 오지랖을 부린다. 궁둥이를 진득하게 붙이지 못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며 건강을 엄청 중요시 한다. 우리가 함께한 세월만큼, 나란 사람은 그녀를 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외할머니는 내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뻔한 스토리다, 자극적이다,'며 욕을 들었지만, 그녀의 시대에 일일연속극은 텔레비전 속에서 굳건하게 자리했다.    

  

나의 외할머니:)



이제 텔레비전 브라운관에서 일일드라마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OTT와 유튜브, 인터넷 개인 방송들 사이에서 더 이상 텔레비전도 대세가 아니다. 나와 동생도 원가족에서 독립했고, 명절이 되야 네 식구가 다 모인다. 오랜만에 만나면 동생은 자기 방에서 게임을 하고, 아빠는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고, 엄마는 태블릿으로 BTS 영상을 본다. 스마트폰으로 각자 보고 싶은 것을 언제든지 보는 세상이다. 내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이제 우리 가족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철저하게 분리되어 각자의 세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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