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떻게 바라볼까
2020년 5월 초, 오프라인 독서 모임을 처음 가보았다. 서로의 나이나 직업을 밝히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랜덤으로 팀을 나누었는데, 한 팀에 다섯 명 정도 모여서 각자 가져온 책에 대해 소개하고 생각할 거리를 말했다. 나는 황상민의 <독립연습>이라는 책을 가져갔다. 제목처럼 저자는 독립된 개체로 살아갈 것을 줄곧 얘기한다. 세상의 통념보다 자신의 정체성대로 살 것을 강조한다. 2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 읽었다. 그때마다 저자의 조언에 밑줄을 긋고 문장을 되뇌였다. 나 역시 홀로 서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나란 사람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나도 찾고 싶었다. 그것을 찾으면 인생의 치트 키를 얻을 것 같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한 여자분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 말에 잘 휘둘리곤 하는 자기 모습이 싫다고 했다. 나도 그런 고민을 했던 적이 있다. 그 분 이야기를 듣다 보니, <보드게임 FLIP(플립)>이 생각났다. 보드게임을 소개하며, 나는 오지랖 섞인 조언을 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휘둘린다는 모습에는 긍정적인 모습도 있을 거예요. 이를테면,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한다든지. 사소한 말에도 귀 기울이는 유연함을 가졌다든지. 자기 모습에 관해 고민하되, 그 모습이 가진 좋은 점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동경하던 나였다. 새삼스러웠다.
<보드게임 FLIP(플립)>을 접한 건 독서 모임으로부터 일 년 전쯤(2019년 4월 말)이었다. 당시의 일기를 보면 온갖 세상의 짐을 다 짊어진 내가 있다. 오랜만에 담임을 맡아서 잘해보려고 애썼다. 3월에 아이들과 처음 만나서, 학부모총회, 상담, 공개수업 등 학교의 큰 행사들이 쏟아졌다. 돌아보면 나답게 여러 행사를 잘 이끌어왔다. 하지만 당시의 내 눈에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내 기대는 아주 높았다. 4월이 되니 서먹하고 서로 조심했던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제 편해졌는지 숨겨왔던 모습들이 드러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들끼리 싸우고 이르고, 화해했다가 또 싸우는 일들의 반복이었다. 갈등이 기본값임을 그때는 잘 몰랐다. 나는 퇴근을 해서도 학교의 문제들을 온전히 다 껴안고 왔다. 밤마다 일기에 고민을 적으며 나를 다독였다. 그렇게 두 달 정도를 버텼던 것 같다.
그러다 오랜만에 이전 학교에서 동학년을 했던 동료들을 만났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학급경영을 잘하는 친구들이었다. 나는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동료들에게서 해결책을 받기를 바랐다. 모임원 중 한 명이 그날 <보드게임 FLIP(플립)>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보드게임 FLIP(플립)>은 총 50장의 카드로 구성되어있다. 보드게임이지만 심리테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색깔별로 5개의 성격유형으로 나뉘어 있다.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 아이스커피 / 마끼아또 / 디카페인" 이렇게 커피에 비유해서 성격을 설명해준다. 자신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카드를 고르다 보면, 많이 고른 카드의 색이 보인다. 당시의 내 유형은 이 중에서 “마끼아또 형과 디카페인 형”이었다.
영어사전에 FLIP의 뜻을 찾으면 “홱 뒤집는다”라고 나온다. 내 성격을 나타내는 카드를 홱 뒤집으면, 같은 내용인데 긍정적으로 표현한 문장이 보였다.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단점의 뒷장에는 '겸손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상대의 눈치를 많이 본다'는 단점의 뒷장에는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감정을 통제하기 어려워요'라는 단점의 뒷장에는 '감정을 잘 표현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차분하게 결정하지 못해요'라는 단점의 뒷장에는 '기발한 생각을 잘해요'라는 장점이 있었다.
그랬다. 이 카드들은 장/단점은 함께 있었다. 내가 가진 모습의 어느 쪽을 볼 지는 나의 선택이었다. '내가 싫어했던 내 모습에도 좋은 점이 있었구나.' '내가 요즘 안 좋은 면만 자꾸 보고 있었구나.'를 새삼 느꼈던 순간이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
"언니가 아이들에게 이것만은 용납하지 않는 것들을 한 번 생각해봐. 그것에 대해서만은 원칙을 지켜나가면, 조금 더 안정될 수 있을 거야."
"나는 어떤 아이가 나에게 예의 없이 말하면, 나도 존중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해. 내가 존중하는 만큼, 나도 존중받길 원한다고 이야기할 것 같아.“
그날 만났던 동료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고민해주었다. 이후에 조금 나아졌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나는 2019년 내내 애썼고, 고민했고, 자주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시간은 지나 올 가치가 있었고, 절대 헛되지 않았다라고. 내가 힘들 때, 자기 일처럼 진심으로 도와주었던 동료들에게도 고맙다.
그리고 1년 뒤, 독서모임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며 조언해주던 나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작년(2022년)에 맡았던 6학년 학생들에게 <보드게임 FLIP(플립)>을 활용해서 국어 수업을 진행했다. 교과서 대신 활동을 해서인지 반응이 좋았다. 아이들도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가장 많다. MBTI, 에니어그램, 사주, 타로, 혈액형, 별자리, 각종 심리테스트가 건재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도 심리테스트를 좋아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마음이 어떤 모양인지 궁금하다. 카톡방에 친구들과 서로의 유형을 공유해가며 ‘너는 그렇구나?!’ 하기도 했고, 에니어그램, 사주, 타로도 원리가 뭔가 싶어서 공부도 했다.
이런 것들은 하나의 도구다.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내가 보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때론 나를 규정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성격유형이라는 어떤 틀에 나를 가두는 건 위험하다. 에니어그램에 대해서 배울 때 강사들이 강조했던 건 사람을 번호로 판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저 사람은 8번 유형이니 저렇게 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유의하라고 배웠다. 그리고 성격 유형의 결과라는 것도 얼마든 바뀔 수 있다. 이건 내가 당시의 나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새 내가 마음에 드는 부분이나, 스스로 부족하다 느끼는 부분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보드게임 FLIP(플립)>도 여러 가지 유형 중 하나로 내 자신을 설명한다. 장점과 단점은 모두 한 장의 카드에 있다. 내가 모자라게 보았던 단점 뒤에는 그 모습이 가진 장점도 함께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가지지 못한 걸 동경하며 열등감을 가졌다. 이제는 내가 가진 장점들, 가치들을 더 소중하게 보려고 한다. 부끄럽지만, 2019년 당시에 애썼던 내가 일기에 적어보았던 나의 장점들을 적어본다. “사려 깊고, 창의적이고, 재밌고, 열정 있고, 신념도 있고, 책임감도 있는, 긍정하는 멋진 나.” 이렇게 내가 가진 좋은 면을 보려고 한다.
내 모습처럼 내가 우리 반 아이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어느 문장에 내가 힘을 실어줄지다. 그건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내게 벌어진 일은 그냥 주어진 상황이다. 나이를 더 먹다 보니 노력으로 바꾸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자주 마주한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나갈지 역시 나의 선택일 것이다.
나에 대해 잘 안다는 건, 나의 한계와 장점을 안다는 건 중요하다. 그런데 장점과 단점은 함께 존재했다. 그리고 나를 규정하는 틀도 변한다. 내가 오랫동안 그토록 찾고 싶던 ‘정체성’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인생에 치트 키까지는 모르겠다. 치트 키가 있는지 없는지는 이제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빠른 길도 좋지만, 하루하루의 경험들이 모인 시간이 때론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황상민의 책 <독립연습> 中 정체성에 관한 문장을 소개하며, 마무리 한다.
나대로, 내 정체성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바로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이다. 정체성은 남과 다른 내 특성이지 남보다 나은 장점이 아니다. 내 정체성을 알면 나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되므로 자신감이 생긴다. 남보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엄정한 사실에 눈을 뜨기 때문이다. 생명의 소중함은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