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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은 Apr 05. 2023

줄 맞추기

1. 어떻게 바라볼까

어느 날 옆반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3반 애들은 어쩌면 교과 이동을 갈 때 그렇게 조용히 가요?”라고 물으셨다. “네?!” 내 교직 경력에 줄 서는 것으로 칭찬(?!)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놀라서 저희 반 보신 거 맞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오랫동안 줄서기에 집착했다. 질서 있게 줄을 서는 선배들의 반이 부러웠다. 그들의 학급은 정돈되고 차분해 보였다. 우리 반은 줄 모양이 삐뚠 건 둘째 치고, 시끄럽게 떠들거나 계단에서 점프하며 장난을 치기 일쑤였다. 학교 행사가 있거나 급식실에 갈 때면 우리 반만 유독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솔직히 많이 창피했다. 나도 우리 반 아이들 줄을 잘 세우고 싶었다.      

 

줄을 잘 세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았다. 서준호 선생님의 <토닥토닥> 책과 유튜브 채널, 긍정 훈육을 담고 있는 <123 매직> 같은 책들에는 정돈된 줄서기에 관한 방법들이 나와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1. 아이들에게 줄을 잘 서는 방법을 알려주기(간격, 손, 목소리 크기, 빠르기 등)
2. 문제 행동에 대해 그때그때 멈추고 신호주기
3. 약속된 신호 3번이 넘어가거나, 충분한 신호를 주었는데도 문제 행동이 지속되면 교실로 돌아오기
4. 교실에 돌아오면, 왜 돌아왔는지, 그리고 다음번에 잘하려면 어떻게 할지 함께 이야기 나누고 다시 하기 

이렇게 몇 번 이동시간마다 돌아오는 것으로 정돈이 된다고 했다.


사실 1학년 아이들도 줄을 잘 서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건데, 중요한 것은 아이가 문제 행동을 했을 때의 ‘교사의 태도’였다. 학기 초부터 ‘우리 선생님은 문제가 생기면 알아차릴 기회를 주는데, 그런데도 소란스러우면 무조건 돌아와.’ 이런 것이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심어지는 게 필요했다. 여기서 교사의 단호함과 일관성이 나왔다. 이러한 교사의 태도가 학급 전체 분위기에도 영향을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참, 말은 쉬운데 직접 하는 건 다른 문제다. 나는 다시 교실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웠다. 내 수업 시간도 아니고, 다른 교과 수업 시간이 있는데 돌아왔다 가는 것은 교과 선생님께도 피해를 주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열광하며 기다리는 체육 시간을 줄이고 돌아오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돌아온 교실에는 싸~한 침묵이 흘렀다. 아이들은 암묵적으로 누구 때문에 교실로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조용히 질서를 지키며 갔던 아이들은 억울해했다. 저학년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탓을 하며 비난하기도 했다. 고학년은 밖으로 티를 내지 않지만 공기로 말해주었다. 나는 그 어색해진 분위기를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문제 행동을 했던 아이가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도, 혹은 내가 미움받는 것도 두려웠다. 그래서 단호하게 돌아오지 못했던 적도 많다. 몇 번의 봐주기가 누적되면, 그제서야 '지난 번 그때 돌아왔어야 했나?' 하며 후회했다. 내가 그때 봐주고 모질게 하지 못한 건 문제 행동을 허용한 거라며 자책했다.        


“줄을 잘 서면, 배움이 잘 일어나는 거야?”

“네가 말하는 정돈된 교실이 뭐야?”

동료언니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언니는 자기 옆 반 선생님이 정말 줄을 그림같이 기가 막히게 세운다고 했다. 그런데 공개수업을 두려워하신다든지의 일화를 전하며, 그 반이 그렇다고 배움이 잘 일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엇, 줄을 잘 선다고 꼭 배움이 잘 일어나는 건 아니구나. ‘줄 잘 서기’와 ‘배움이 잘 일어나는 교실’이 서로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닐 수 있구나. 그럼, 나는 왜 그토록 줄서기를 신경 썼을까? 돌아보니 내 안의 수치심, 타인을 의식했던 마음 때문이었다. 


일단 나부터 다독이기로 했다. 내가 교실로 돌아오지 않은 것을 두고 내가 모질지 못하구나, 단호하지 못했어.라고 자책하기보다는 그때 내가 내린 최선의 결정이라 믿기로 했다. 그리고 참다가 돌아왔다면 그때의 나 역시 용기 내서 잘했다고 말하기로 했다.      


이제 아이들에게 말할 차례다. 아이들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교사의 모습에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도 연습이 필요했다. 그 순간의 침묵을 꾹 참고 돌아와야 할 때가 있었다. 용기 내서 몇 번 돌아와 보면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이제는 교실로 다시 오면, 결단한 나 자신이 뿌듯하다. 무표정하게 교실로 돌아오지만 속에서는 나를 마구마구 칭찬해 준다. 아이들에게는 우리 반의 안전을 위해 선생님이 힘들게 결정했다고 충분히 알려준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해보자고 말한다.       


줄을 잘 선다는 것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 허용되는 것이 누군가는 아닐 수 있다. 다른 선생님도 그 누구도 아닌 중요한 건 ‘나의 기준’이었다. 그것을 학생들에게 충분히 알려주고,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것이 그렇게 내가 헤매고 찾았던 ‘학급 운영의 키’였다. 도서 <교실 속 딜레마 상황 100문 101 답>에서 ‘왜 학교에서 실내 정숙을 가르쳐야 하나요?’라는 물음에 대한 김민곤 선생님의 대답은 ‘나의 기준’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실내에서 뛰고 장난치거나 고함지르지 않는 것이 남을 배려하며 더불어 사는 것임을 깨닫게 돕는 것이지요. 아이들에게 그것을 알려 주는 일은 교사의 중요한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교실이나 복도에서 뛰고 장난치지 않으며, 화장실이나 수돗가에서 차례를 지키고, 고함치거나 남을 밀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통제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행동을 가르치는 것임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려 봅니다. (김민곤 선생님 대답 中)     


그리고 그 기준은 나 혼자 제시할 때보다 아이들과 합의가 되었을 때 더 설득력이 있었다는 것을 경험했다.      




알아차리면 집착을 조금 내려놓는다. 그때 우리 반 고백하자면…조용하지 않았다. 아마 학급 회의에서 줄 설 때, 이름을 두 번 불리면 끝나고 5분 남았다 가자고 약속해서 조용해 보였던 것 같다. 당시에 나도 진짜 소머즈 귀가 되어 이름을 부르고, 원칙대로 몇 번 남기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켜졌다. 이러다 또 풀리기도 하고 다시 지키기도 하고 그러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나에게 줄서기가 집착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다 간혹 이렇게 타인의 눈에 줄을 잘 선다는 갑작스러운 칭찬을 받기도 했다.      


“얘들아, 4반 선생님이 우리 반 아까 영어실 갈 때 어쩜 이렇게 조용히 가냐고 하시더라. 선생님은 너무 놀랐잖아?!”

“네?! 우리 가요?! 4반이 더 조용하던데…”

역시 솔직한 게 너희의 매력이다. 그래도 속으로 좋아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줄을 잘 서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다른 배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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