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미제사건
수능이 끝나고, 친구들과 길거리에서 타로를 보았다. 관심은 온통 연애운이었다. 내가 뽑은 카드는 갑옷을 입은 용사가 칼을 들고 돌진하고 있었다. 연애운으로 뽑은 것치곤 좀 살벌한 그림이었다.
“잔다르크야, 잔다르크. 자기는 오는 남자들을 다 쳐내네.” 타로 주인이 말했다.
‘캠퍼스에서 펼쳐질 달콤한 로맨스를 상상하고 갔는데, 무슨 여전사가 나와?’ 속으로 생각했다. 옆에 있던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날 이후로 내 별명은 잔다르크가 되었다. 타로 때문인지 뭔지는 몰라도 나는 다가오는 남정네들의 작은 호의도 가차 없이 싹을 잘라버렸다. ‘쟤가 나를 좋아하면 어떡하지’라는 괜한 걱정과 착각을 하면서.
도끼병을 풀이하면 다른 사람이 자기를 찍었다고(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병이다. 나의 유구한 도끼병과 철벽녀의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진표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우리 집은 천안으로 이사를 왔다. 당시 막 새 아파트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엄마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주머니들과 친해졌다. 남태우, 정준혁, 한진표, 그리고 나. 그들의 자녀였던 우리는 비슷한 또래였고, 함께 미술을 배웠다. 여자는 나뿐이었지만 나는 꼭 끼어서 놀았다. 나는 웬만한 남자아이들보다 목소리도 동작도 컸다고 한다. 말보다는 발차기가 먼저 나가던 아이였다. 그때만 해도 남자애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꽤 오랫동안 미술을 함께 배웠다.
어느 봄날이었다. 미술선생님과 우리 넷, 그리고 아주머니들도 함께 나들이를 갔다. 공원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도시락도 먹고, 잡기놀이를 했다. 나는 열심히 애들을 잡으러 뛰어다녔다. 그림 그리기보다는 달리는 데 자신이 있었으니까.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도 잠이 들었다.
“진표야, 너 아직도 다현이 좋아해?” 내 이름을 듣고, 잠에서 깼다. 운전석에 계신 진표 아줌마가 진표에게 하는 말이었다. 뒷자리에 앉은 다른 애들은 모두 자고 있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나는 눈을 감고 계속 자는 척을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차 안에서 나오는 작은 소리까지 놓칠세라 귀를 곤두세웠다.
좋아해?라는 말이 자꾸만 귓가에 울렸다.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간지럽게 뱉으며 속삭이던 말. 그전까지 엄마와 아빠 말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진표는 그냥 내 옆에서 코 찔찔거리며 따라다니던 남자아이 중 한 명이었다. 나는 혼자 심각했다.
그 후 내 어떤 모습을 진표가 좋아했을지 신경이 쓰였다. 그 애 앞에서만큼은 말도 행동도 조심하게 되었다. 동시에 내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애만 보면 자꾸 미소가 나왔다. 잠을 자기 전에도 생각났다. 만약 진표가 내게 고백하면 어떻게 할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 아이는 어느새 다르게 보였다. 더 이상 어울리는 무리 중 한 명이 아니었다.
어느 날 반에서 소문이 났다. 주인공은 나와 진표가 아니었다. 나와 등하교를 같이 하던 태우였다. 반 애들이 우리 둘을 묶어서 사귄다며, 내가 태우를 좋아한다면서 놀렸다. “누가 그래?! 아니라고!” 나는 누가 그런 소문을 냈는지 당장 찾아가서 혼내줄 기세로 방방 뛰었다. 그것이 진표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이미 중요한 사람이 생겼다. 그렇기에 이제 다른 남자애들과는 확실히 선을 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진표는 내가 기다리던 고백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내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사이에는 뭔가가 있다며 나 혼자 믿었다. 그러다 복도에서 진표가 다른 여자애랑 있는 것을 보았다. 진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저래도 되는 건가? 좋아한다는 건 유일무이하게 나에게만 주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학년이 더 올라가면서 우리는 더 이상 같이 미술을 배우지 않았다. 나도 남자애들보다는 여자아이들 무리로 들어가 어울렸다. 그리고 내가 4학년이 되던 해, 진표는 멀리 전학을 갔다. 진표 아줌마가 무심코 던진 돌멩이는 내 마음만 흔들어놓고 어떤 증표도 남기지 않은 채, 미완성의 그림으로 남았다.
이후 나는 여자친구들과 반에서 좋아하는 순위를 만들면서 비밀이야기랍시고 속닥거렸다. 인기가 많다는 남자애를 따라서 좋아해 보기도 했다. 여중, 여고는 남자애들과는 분리된 세상이었다. 내 환상은 오히려 커졌다. 인터넷 소설을 읽고, 드라마 남자 주인공에 열광하고, 사랑 노래를 따라 불렀다. 대학교는 내가 꿈꾸던 로맨스를 실현시켜 줄 무대였다. 미완성의 그림이 아닌, 완결된 나만의 사랑이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대학생이 된 나는 누군가 내게 보낸 작은 호감과 호의를 다루기 어려워했다. 남자동기들 앞에서 내 말투는 딱딱했고, 행동은 뚝딱거리는 로봇처럼 어색했다. 혼자 도끼병이 발동해서, 마음에 없는 상대라면 확실히 선을 그었다. 그것이 배려이고, 나의 선(善)인 줄 알았다. 상대의 감정의 진위여부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게 문제다.
반면에 호감이 있던 상대라면, 그가 건넨 작은 친절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내 마음은 바람을 가득 담은 풍선처럼 금세 커졌다. 잔뜩 들뜬 마음은 상대의 행동에 다시 쪼그라들었다. 그가 준 호의는 나뿐이 아니었다. 그러면 철벽을 단단히 세우고, 나만의 성안에서 로맨스에 대한 환상을 키워나갔다.
사람들은 썸단계, 사귀는 초반. 그러니까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그때가 더 설렌다고 한다. 나는 모호한 것들과 정해지지 않은 관계를 참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탐정이 되어 그가 보내는 눈빛, 지나가는 말, 작은 제스처, 그날의 공기 하나하나까지 의미를 부여하며 증거를 수집했다. 어떤 경우에는 줄어드는 그의 마음을 잡으려고 애썼다. ‘모 아니면 도다!’ 끝장을 보려고 내게 주었던 그것은 무엇이었냐며 되물었다. 빨리 사건을 해결하고 싶었다. 나는 썸을 썸대로 즐기지 못했고, 관계의 이름을 붙여야 편안했다.
친구들과 서로의 첫 연애가 언제 시작될지 기대하던 20대. 소개팅과 미팅은 중대 이벤트였고,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어도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이제 그 친구들은 하나 둘 결혼을 했다. 내가 만든 철벽 역시 점점 허물어졌다.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그사이 내 성안에 들어왔던 사람들도 생겼다. 그렇게 이름 붙일 수 있는 만남이 이뤄지고 또 사라졌다. 나이를 먹어서 편한 점은 내게 오는 호의가 이성적인 관심이 아니라는 전제를 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그런 작은 친절과 호의를 가지고 대한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마음인가?
알 수 없는 오해와 착각들. 콩깍지가 씐 채 보이는 이미지로 설렘이 시작되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여물지 않은 이 서툰 감정은, 한편으로는 얼마나 뒤집히기 쉬운가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관심과 호감은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막중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가벼워졌다.
진표가 진짜 나를 좋아했었는지 아니었는지 모른다. 나 역시 진표를 좋아했다기보다는 좋아하는 마음을 즐겼다. 우리 사이에는 직접적인 어떤 증거도 남아있지 않다. 더 이상 그 진위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한편으로 해결되지 않고 남았기에 오랫동안 '나의 첫 번째 미제사건'을 간직할 수 있었다. 언제든 웃으며 꺼내 볼 수 있는 봄날을 선물해 준 9살 그 아이에게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