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사람 : 백수 생활
렛's 퇴사 일기
오랜 시간이 흘러 누구의 무엇도 아닌 혼자가 되었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슬픔은 나의 힘'
첫 직장은 역사가 오래된 의료계열 중견 기업이었다. B2B 유통이 주 영역이었던 그 회사에서는 무언가를 새로 디자인할 일이 거의 없었다.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는 나이테처럼 쌓여야 하는데, 기존 디자인을 수정하고 운용하는 게 업무의 대부분이었다. 몇 달 되지 않아 이 회사를 계속 다니면 나중에 경력직으로 이직하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곧 여기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여기가 마지막 회사여도 괜찮을까?
회사는 마치 작은 왕국 같았다. 사장님은 ‘더 빨리, 더 많이, 남들보다 한 발짝 더’라는 말만 배운 앵무새 같았다. 두 번째 자리는 열심히 일하는 시늉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 차지했다. 그 아래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과 오랜 기간 회사에 충성했어도 언제 해고당할까 두려워 쩔쩔매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막연히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성실하게 출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를 갈며 떠날 기회만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회사에서만 통할 대수롭지 않은 권위로 성채를 쌓았고, 어떤 이는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힘겨운 날들을 덮으며 살아갔다. 죽을 만큼 밉거나, 애처롭지만 사랑스러웠던 그 모습 중 하나가 곧 내 미래였다. 거기에 과연 내가 원하는 자유가, 내가 꿈꾸는 평화가 있을까? 다들 그렇게 산다지만, 정말 그런지 내가 직접 다른 세상으로 나가서 경험해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소속된 회사가 있어 매달 월급이 나오고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장점이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일단 회사에 들어간다. 회사는 직원을 자기 입맛에 맞게 키운다. 그렇게 맞춤형 인력으로 능력 없이 길만 들 때쯤이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회사에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면 회사는 미련 없이 돌아선다. 회사를 떠나야 할 때 내 정체성의 버팀목이 ‘과장’, ‘팀장’이라는 직함뿐이라면, 언젠가 질 수밖에 없는 회사와의 게임에 영영 휘둘리겠지.
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행복주택*을 신청하려다가, 자격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생'도 타의적 실업을 당한 '재취업준비생'도 아니어서 대상이 아니란다. 무소속이 되었다는 게 처음으로 실감이 났다. 나는 이제 학생도 회사원도 아닌, 사회가 바라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대학생, 사회초년생, 신혼부부 등에게 저렴한 임대료로 공급하는 공공임대주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