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없는 레이스 : 첫 퇴사
렛's 퇴사 일기
첫 직장을 그만두기로 했던 순간, 나는 사무실에 혼자였다. 여느 때처럼 박람회를 앞두고 며칠씩 야근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수 없는 자리에 입사했던 나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선임 디자이너가 되었다. 수시로 바뀌는 영업팀 요청에 시달리며 온갖 인쇄 마감을 겨우 맞추고 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박람회장에 나가 주말 근무를 했다. 다른 팀에서 쫓겨나듯 옮겨온 새 팀장님은 우리 팀 실무를 잘 몰랐다. 그저 사장님 눈 밖에 날까 안절부절못하며 모든 사람을 들쑤시고 다닐 뿐이었다.
산더미 같은 업무량과 나를 열 받게 하는 몇몇 사람이 퇴사 사유의 지분을 꽤 차지하긴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내 삶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조직에 휩쓸리며 자신을 지워가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직 회사와 나 사이의 균형을 잡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계속 근무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삶을 추스를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한발 후퇴하기로 했다.
"왜? 대체 왜 그만둬? 오늘 아침에도 사장님한테 혼났는데, 너까지 나한테 왜 이러니."
일주일만 더 생각해보라며 붙잡던 팀장님은 면담이 끝나자마자 인사팀에 전화를 걸어 급히 채용공고를 냈다. 퇴사 소식은 삽시간에 전사로 퍼졌다. 왜 그만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를 짚어보자면 수도 없이 많았지만, 하나만 고르라면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그만둬야겠다는 확신만은 있었고, 사직서에는 '일신상의 이유'라고 쓰면 그만이었다.
퇴사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집 근처 공원이 오랜 단장 끝에 완성됐다. 가족, 친구, 연인, 반려동물과 함께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은 다들 행복한 얼굴이었다. 서로의 눈동자에 비치는 행복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그들에게서는 빛이 났다. 회사 사람들은 그 광채를 가슴속 아주 깊은 곳에 감추고 다닌다. 누군가는 어쩌면 그 불씨를 꺼내 보는 걸 영영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저녁마다 '그냥 사람들'을 보러, 희망을 나누어 받으러 그 공원에 갔다.
백수 생활 첫날은 신나고 홀가분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덤덤했다. 며칠이 지나 가슴을 메웠던 분노가 옅어지면서 조금 허무해졌고, 독기가 빠져나가면서 어딘가 망가진 듯 공허해졌다. '00사 사원인 나'를 벗어버렸으니 입사 전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나? 나는 이미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건가? 이제 나에겐 그런 생각을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