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s 퇴사일기
졸업 전에는 가야 할 길을 꽤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빨리 앞지르는 것, 대체로 모든 사람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비슷했다. 학교가 무작정 앞으로 뛰는 한 갈래 길이었다면, 사회는 탁 트인 벌판이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고민하느라 머뭇거리는 사이 옆 친구들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래서 엉겁결에 나도 뛰기 시작했다. 맞는 방향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옆 사람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고 그동안 배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학교에서는 사회 구성원이 되는 법을 배웠고, 회사에서는 현실을 알아간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나를 찾는 법', '나를 알아가는 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욕심내지 않고 충만하게 사는 법, 무기력해지지 않으면서 내 한계를 아는 법, 겸손하면서도 강단 있는 사람이 되는 법, 내 중심이 되어 세상에 휩쓸리지 않도록 지켜줄 것들을 나는 하나도 몰랐다.
이전에는 중요한 선택일수록 마음 가는 대로 결정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디자인을 택한 이유도 단순히 평생 질리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 하나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삶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졌다.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손에 쥔 패가 적어질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이제는 내 선택이 정말 최선인지, 아니 내가 원해서 내린 결정인지조차 자신이 없어졌다. 잘 모르는 길로 가도 정말 괜찮은 걸까.
회사가 나를 디자이너로 만드는 건 아니다.
대학 졸업반 때 썼던 노트를 정리하다가, 과거의 내가 이렇게 끄적여둔 걸 보았다. 멋있었다. 디자인은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곧 내 정체성의 일부이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벌써 그 마음을 잊고 초조함에 휘둘리며 작은 세상에 갇혀 살고 있었다. 지금 내게는 '디자인 경력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무엇'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배움과 경험이 필요했다.
디자이너로 일하고, 마음이 답답하면 글을 쓰고, 이따금 노래한다. 나에게 '표현하는' 습성이 있는 건 특별한 재능이나 원대한 꿈이 있어서가 아니다. 끊임없이 표출하고 세상에 드러내는게 나에게 꼭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속이 많이 꼬여 있어서다. 그 속내를 조금씩 내뱉을 때 느끼는 묘한 해방감, 공감하는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 그런 작은 만족감이 내게 소중하다.
이런 특성에 들어맞으면서 아직 활용해본 적 없는 소질을 살릴 수 있는 일, 그리고 또다른 경력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일. 그 일을 찾으려고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공책에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잔뜩 써내려간 후, 그 요소들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찾으려 애를 썼다. 그렇게 나는 이 공백기에 출판번역을 배워보기로 결정했다. 오랜만에 어디로 갈 지, 어디에 닿을 지 모르는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