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으로부터 (ft. 칭따오 칼 라거펠트 에디션)

by 심루이

2020년의 계획은 모든 게 어그러졌다. 우리 가족은 아빠 칠순 기념 크루즈 여행을 계획했었고, 결혼 10주년에는 둘이 아닌 셋이 되어 우리의 신혼여행지였던 하와이에 가려고 했다. 크루즈는 코로나의 온상이 되어 우리는 크루즈의 ‘크’자도 입에 올리지 못했고, 결혼기념일에 나는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이 아닌 베이징 ‘후따’에서 칭따오 맥주와 함께 마라롱샤를 열심히 뜯어먹고 있었다.


정세랑 작가의 책 ‘시선으로부터’가 2020년 겨울에 내게 다가온 건 운명이었을까? 제사만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세상을 떠난 신여성 ‘심시선’ 할머니가 주인공인 이 소설은 장녀 명혜가 10주기 기념 제사를 기획하면서 시작된다. 그것도 심시선 여사가 젊은 시절 머물렀던 하와이에서. 하와이에서 전 부치고 난리 치자는 말이냐는 동생들의 반발에 명혜는 새로운 방식의 제사를 제안한다. 심여사가 걷던 하와이를 걸으며 각자만의 최고의 순간을 찾아온 뒤, 그 증거를 제사상에 올리자는…


이 기상천외한 한 번의 제사를 위해 처음에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가족들은 투지를 불태운다. 심시선 여사에게 전할 ‘매지컬 모멘트’를 위해 훌라를 배우고, 화산섬에 가고, 서핑을 타고, 팬케이크를 먹고, 미술관, 박물관에 가고 하와이의 새를 쫓아다닌다. 모두가 찾은 최고의 순간들이 그렇게 제사상에 모인다.

비록 결혼 10주년 하와이 여행은 실패했지만 이 소설 속의 하와이는 내가 경험한 가장 유쾌하고 신나는 하와이였기에 나는 2020년의 어그러졌던 꿈들에 조금쯤은 너그러울 수 있었다.

WeChat Image_20201227004931.jpg 그러니까 심시선으로부터,/ 이 소설책을 정말 덥석 내게 안겨준 C 언니에게 감사.




어릴 때부터 이벤트를 좋아했던 나는 가족에게 축하할 일이 생기면 풍선을 불고, 편지를 쓰고, 새벽에 몰래 일어나 선물을 식탁에 올려두는 등등의 유난을 떨곤 했는데 지금도 비슷하다. (주로 아빠의 승진이나 가족의 생일, 앤드류의 군대 100일 휴가 등등) 지금은 나보다 이벤트를 더 좋아하는 원심 2호가 곁에 있다는 것 외에는… 이제는 축하 공연으로 댄스도 준비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내가 생각하는 이벤트의 화룡점정(画龙点睛)은 사실 당사자가 이벤트를 맞닥뜨렸을 때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며 그 사람의 표정과 마음을 상상했을 때의 그 설렘. 그 준비 과정 자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한다. 그러니 당사자보다 준비하는 사람이 더 행복한 것이 바로 이벤트 아니겠냐며. 나이가 들어도 축하하는 일들에 마음을 쓰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내가 되었으면, 귀찮은 일들을 굳이 찾아서 유난을 떠는 지금 모습 그대로 늙고 싶다. (물론 그녀와 함께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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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특히 狗고생한 춘을 위해 이벤트 마련
2020-12-23-21-00-03.jpg 심이가 직접 낸 포스트잇 하트 아이디어




2020년에 가장 잘한 일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일이라는 S 언니의 말처럼 어떤 극한 순간에도 약간의 유머는 잃지 말자는 것이 올해의 다짐이었다면, 내년을 맞이하는 나의 주문은 세상과 당신과 나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기. 천재지변과도 같은 재난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이 순간을 더 즐겁게 사는 것만이 인생의 진짜 의미'라는 깨달음을 쭉 잊지 않기. 그래서 앞으로는 과감하고 엄청난 일에는 오히려 더 태연하게, 작은 일에는 더 마음을 쓰며 살아보면 어떨까.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클리셰 같은 조언 앞에 늘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결과에 늘 초조해했던 과거의 나와 안녕하고, 즐거운 과정에 진짜 귀 기울여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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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따오 * 칼 라거펠트 에디션


칭따오 칼 라거펠트 에디션을 뜯는다. 이 귀여운 걸 어떻게! 하면서 한 박스를 이틀 만에 홀짝홀짝 마시며… 패션계의 한 획을 그었던 칼 할아버지의 명언을 생각해 본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맞아, 우리 생애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꽤 괜찮은 한 해의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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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병을 보고 언제나 할아버지의 명언을 생각할 수 있도록 전시



20201227005414.jpg 그나저나 이 사진 진심 찰떡


#베이징생활탐색자 #베이징도시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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