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애주가의 숙취 단상, 마오타이 박물관 (茅台博物馆)

숙취가 없는 세계

by 심루이

애주가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술은 좋은데 ‘숙취’는 싫다. 그럼 ‘숙취가 없도록 적당히 마시면 되잖아’라고 하겠지만 마시다 보면 ‘적당히’가 쉽지 않고, 나이가 드니 적당히 마셔도 숙취가 있다. 더 억울한 건 요즘은 잘 취하지는 않고 숙취만 있다. 아아 흥은 없고, 괴로움만 남았다니… 너무 슬프다.


숙취로 고생하며 멍한 상태로 귀한 시간을 날리다 보면 늘 그랬듯, ‘나 이제 술 끊을 거야’라고 다짐한다. 며칠 지나면 맥주는 술이 아니니까 한 잔만 마셔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 또 기분 좋으면 왕창 마시고, 숙취가 있고, 참회하고, ‘이제 진짜 끊어야지’의 무한 루프.

2017-03-30-22-09-41.jpg 물보다 싼 듯한 칭따오 맥주


굳이 구분하자면 나는 술이 잘 안 취하는 쪽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냉장고에서 맥주를 음료수처럼 꺼내 마시던 앤드류와 고깃집에 가면 고기보다 술을 먼저 시키는 해암 선생을 보면 역시 유전자의 영향일테다.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긴장하며 레몬 소주를 마셨는데 신체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원래 술이 이런 건가? 길어서 반응이 오는 데 한참 걸리나? 의심하며 홀짝홀짝 마셔보는데 무슨 연유에선지 친구들의 혀는 꼬여가고, 목소리 톤은 높아지고,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나의 정신은 여전히 말똥말똥. 그때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친구들은 이후로도 쭉 웃고 울더니, 영어를 하고, 가끔은 뛰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웃긴 주사는 갑자기 영어로 말하는 주사다.) 그러니까 나는 인간이 동물에 가까워지는 귀엽고 귀한 모습들을 거의 맨 정신으로 지켜본 후 가끔은 뒤처리까지 해야 하는 형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2021-06-16-10-35-36.jpg @茅台博物馆




급기야 운명의 장난처럼 업무 파트너와 술을 종종 마셔야 하는 업까지 갖게 됐다. 의도하지 않게 회사에서 제일 잘 마시는 포지션에 등극하게 됐다. 말술 이미지가 싫어서 ‘잘 마시는 게 아니라 그냥 술에 잘 안 취하는 거 같아요’라고 푸념도 해 보았지만, 그게 그 소리라며 전혀 먹히지 않았다. 나름 알뜰함을 자랑하던 내가 제일 부러워하던 사람은 맥주 2병만 나눠 마셔도 온 가족이 취할 수 있다는 선배 A였는데, 평생 우리 가족과 선배 가족이 알코올에 지불하는 경제적인 비용을 생각해 보면 맙소사! 나는 벌써 강남에 집을 사고도 남았다고!

서른 다섯을 기점으로 예전처럼 맥주에 와인 마시다, 막걸리로 마무리하는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내일의 안녕을 위해 오늘의 흥을 자제할 줄 아는 성숙한 어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숙취를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2017-04-20-22-14-27.jpg
2020-11-14-16-37-15.jpg
마라 땅콩과 라티아오


그런 나에게 반갑기 그지 없는 숙취가 거의 없는 아름다운 술이 있었으니 바로 백주다. 독한 만큼 깔끔하고, 무엇보다 뒤끝이 없다. 마실 때 빨리 취하고, 내가 사랑하는 중식과의 궁합도 찰떡이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중국에는 정말 다양한 백주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브랜드는 마오타이(茅台)가 아닐까 싶다. ‘국빈주’라고 불리는 최고 명주인 마오타이는 너무 상급 레벨의 술이라 사실 나도 제대로 마셔 본 적은 없다. 그보다 아래 레벨인 수정방이나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인 '江小白' 정도를 가끔 마셔본 정도였다.




그날도 어제처럼 내일의 목적지를 찾아 확대하고, 축소하기를 반복하며 침대 위에서 바이두 지도 여행을 하다 우연히 발견했다.


마오타이 박물관(茅台博物馆).


내가 아는 그 마오타이가 맞는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과연 맞았다. 하긴 안동소주 박물관도 있는 마당에 마오타이 박물관이 없을 리가 없지. 하지만 베이징의 심장부, 천안문 바로 옆에 있을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성지 순례를 하듯 단정한 마음가짐으로 ‘南池子大街’에 있는 마오타이 박물관을 향해 길을 나섰다.


마오타이는 청나라 초기에 귀주성의 마오타이라는 거리에서 수수를 주원료로 하여 밀 누룩을 써서 일종의 소주를 양조한 것을 시초로 만들어진 술이다. 원재료인 수수를 9번 끓여낸 다음 누룩을 8차례 넣고 발효 과정을 거친다. 이후 7번 받아낸 술을 3년 이상 숙성시켜 만든다고 하는데 알코올 함량은 53-55도 정도다. 스코틀랜드의 스카치위스키, 프랑스의 코냑과 함께 세계 3대 명주로 꼽힌다. 1915년 파나마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서 사람들이 서양 술에만 관심을 가지자 중국 담당자가 일부러 마오타이를 떨어뜨렸고, 깨진 술병에서 진동하는 마오타이만의 특이한 향에 이끌려 이 술의 매력을 모두 알게 되었다는 '신의 물방울'에나 나올법한 만화 같은 일화가 있다.


박물관은 각종 마오타이 에디션과 마오타이의 역사를 잘 정리해 두었는데 우선 갖가지 다른 매력을 뽐내는 다양한 에디션에 눈길이 간다. 몇 병 사서 거실에 전시해두면 부를 뽐낼 수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비주얼의 병들도 많았다. 마오타이는 ‘정치주’라고도 불리는 만큼 전 세계 각지의 유명인의 방중 시 마오타이 대접은 필수였다. 그러니 마오타이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누가, 언제 중국에 방문했는지 등등의 중국의 역사까지 함께 만날 수 있다. 주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마오타이주에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을 듯. 마오타이는 2019년 주식 시장에서 처음으로 1,000위안을 돌파한 단일 종목이 되었고, 시가 총액 최고의 음료수 제조 회사인 코카콜라까지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일본의 도요타, 디즈니, 나이키보다 가치가 더 높다.


마오타이는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 가장 좋아하는 술이며 덩샤오핑의 마오타이주 사랑은 남달라 90세가 넘어서도 매일 반주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72년 닉슨 대통령 방중 시 접대한 술도 마오타이였다.


훠궈나 느끼한 중식과 백주의 마리아주는 언제나 좋다. 그리고 백주를 마실 때 불타오르는 목부터 시작해서 몸속의 장기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비슷한 연유로 여느 서양인들에게 마오타이는 '마시는 액체 면도날'이라고 종종 불리기도 한다. 박물관을 방문하기 전에 시음 코너가 있지 않을까 나름 기대했지만 그런 코너는 없었다. 그랬다면 더 즐거운 산책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2021-06-16-10-36-58.jpg
2021-06-16-10-53-12.jpg
2021-06-16-10-38-14.jpg
2021-06-16-10-43-58.jpg
2021-06-16-10-38-58.jpg
2021-06-16-10-45-14.jpg
2021-06-16-10-39-52.jpg
2021-06-16-10-47-05.jpg
2021-06-16-10-48-05.jpg




숙취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다. 흥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세계. 그렇다면 사람들은 더욱 거침없이 술을 마실 테고, 세상은 좀 더 어지러워질 테고, 안 그래도 비어 있는 내 지갑은 더 텅텅 빌 테고, 우린 평생 집 따위는 살 수 없을 테고… 안되겠다. 적당한 숙취는 꼭 필요하다는 결론.


베이징_도시산책


keyword
이전 06화베이징의 교통과 경이로운 운전실력, 西打磨厂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