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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Feb 20. 2017

적응력 대장들


한달 남짓 중국어를 배우고 이곳, 북경에 온 춘은 회사에서 여러 가지 기록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중국어도 잘 모르면서
출근 첫날, 혼자 디디츄싱(중국판 우버)을 불러 휴대폰을 만들러 가질 않나,
회식 장소에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도착하질 않나,
입국 1주일도 안되었는데 '진동 닷컴'(우리 나라로 치면 11번가)에서 물건 배달을 시키고… 등등

첫 해외 생활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무대뽀 정신에 모 직원은 “너 사실 중국인이지”하고 의혹 제기를 했다는. ^^;;;

다른 무엇보다 중국어를 잘 모르면서 인터넷몰에서 물건을 시키고 배달 받는다는 게 신기해서 물어보니

우리나라 쇼핑몰 UI와 유사할 테니 (생각해보니 춘은 처음에 인터넷 서비스 기획자로 출발했다!)
1. 대강 '옵션'이나 '구매'로 보이는 글자를 긁어다가 네이버 번역기에 붙여서 확인!
2. 위챗 페이로 결제, (결제는 위챗 페이, 알리페이 한 번만 등록해두면 정말 쉽다)
3. 택배 아저씨로 추정되는 사람이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지 않고
“지금 회의 중이니 경비실에 맡겨주세요”라는 문자를 보냄.
4. 알아들었나? 하고 마지막으로 확인해서 O.K 사인을 받고, 물건을 찾음

이런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이것저것 주문을 해서 회사 책상에 박스가 쌓여가니
중국에 오래 계셨던 차장님도 오빠에게 물건 주문을 부탁했다고…ㅋㅋㅋㅋ

11만 원짜리 삼천리 자전거를 가지고 산티아고 길을 떠났던 날부터 거침없는 (=대책없는) 성격인 줄은 알았지만 사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우리가 북경에 입국한 후 모녀 3대를 이끌고 교통 환경(ex. 2차선에서 유턴 시도 등등)에도 좁은 골목 사이사이를 이리저리 어찌나 잘 다니는지,
몇 번 와 봤구나, 나 없이 뺀질나게 다녔구나 했었는데, 그것도 다 초행길이라는 사실.
바이두 내비게이션만 있다면 무서울 게 없다는 원 반장.

매우 든든하기 짝이 없다. 오빠와 함께라면 아프리카도 갈 수 있을 듯. ㅎㅎㅎ

춘 뺨치는 적응력 대장은 우리 은재다. 워낙 친구와 사람을 좋아하는 은재라 중국에 오면서 걱정이 많았다.
그곳에서의 친구들을 그리워하면 어떡하지, 아직 너무 어린데 낯선 곳에서 친한 친구없이 괜찮을까, 등등
  
그래서 많은 유치원 중에 적응을 제일 무난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한인 유치원에 등록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월반해서 6세 반으로)
몇 군데 상담을 열심히 한 오빠 말에 따르면 인성과 한글을 중요시하는 곳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고.
  
은재의 첫 번째 유치원인 '로즈아이 유치원'은 유치원 한가운데에 실내 놀이터가 굉장히 크게 있어서 그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매일 1-2시간씩 아이들이 반 상관없이 신나게 놀아서 적응이 빠르고,   마치 키즈카페에 가는 즐거운 마음으로 유치원에 온다고 한다.
  
첫날 떨리는 마음으로 회사에서 잠시 들린 오빠와 함께 은재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마음을 졸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하원 시간인 4시!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낯선 중국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와 두근두근하며 버스에서 내리는 은재를 보는데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리자마자 신나서 하는 말.

“엄마, 나 친한 친구 생겼어”
너무나 기쁜 말이었는데 내가 너무 당황해서 “저.. 저... 정말?”이랬음. ㅎㅎㅎ
  
어쨌든 은재는 새로운 유치원이 참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간식을 먹으며 유치원 친구들,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을 쫑알쫑알 수다를 떤다.
일을 하던 예전에는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듣고, 공감해주고, 간식을 챙겨주는 일.  
'오늘은 무엇이 가장 신났는지, 왜 슬펐는지, 혹시 운 적은 없었는지' 은재에게 묻는다.

하이톤 목소리가 참 다정한 은재 담임 선생님은 일주일에 2번씩 전화를 주신다.
은재가 밥도 정말 잘 먹고, 수업에도 열심히 참여한다며, 영어 수업에서는 대답을 잘해서 오히려 리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그럴리가)
  
유치원에서의 첫 주가 지나고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은재 옆에서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걱정했는데 은재가 적응을 잘해서 참 다행이다”라고 했더니
옆에서 놀고 있던 은재가 큰 소리치며 하는 말.

“걱정하지 마! 다음 주에도 잘할 거니까!”
  
푸하하. 야무진 은재.
엄마와 할머니 대화를 몰래 듣다가 눈 흘기며 큰소리치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엄마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빠와 엄마를 뛰어넘어 은재가 적응력 왕인 듯.
  
춘은 이제 내게 “이제 너만 잘 적응하면 되겠다"라고 했다는. -_-
  

하.지.만
낯선 곳에서 중국 상사를 모시고 많은 난관에 부딪히며 일을 해야 하는 춘과
아직 여물지 않은 5살 아이가 내면적으로 느끼고 있을 두려움과 낯섦이 얼마나 클까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모쪼록 이 시기들이 우리 은재의 앞으로의 생에 큰 도움이 될 굳은살 같은 경험이 되기를.
무엇보다 우리 셋 다 이곳에서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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