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열일곱의 나는 ‘루쉰’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면서 이 글귀가 너무 좋아서, 노트 맨 앞 장에 쓰고 늘 지니고 다녔다. 삶이 아주 절망적으로 느껴질 때마다 땅 위의 길을 생각했다. 절망보다 더 무서운 건 ‘무망’이며, 삶 속에서 희망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마흔 살의 여름, 베이징 루쉰 박물관에서 이 글귀를 다시 만났다.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 루쉰(1881-1936)은 중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이자 사상가로 <광인 일기>, <아Q정전> 등을 썼다. 샤오싱(소흥)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저우수런'이다. 1902년 일본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중국의 비참한 현실을 확인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평생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며, 중국의 현실을 고발했다.
阜城门内宫门二条 19号에 위치하고 있는 베이징 루쉰 박물관은 루쉰이 베이징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공간이다. 관람은 무료, 위챗 공중 계정으로 미리 예약하고 방문해야 한다.
박물관 정문을 통과하면 정원 왼편에서 페퇴피의 흉상을 만날 수 있다. 루쉰은 헝가리의 서정 시인이자 오스트리아 지배에 항거하는 혁명전쟁에 참가했다가 조국을 위해 전사한 혁명가 ‘페퇴피 상도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산문에 보면 그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나온다.
페퇴피처럼 걸출한 영웅도 어두운 밤을 마주하면 발걸음을 멈추고, 아득한 동쪽을 회고했다. 그가 말했다. 절망이 허망하다면, 희망 역시 그러하다.
만약 내가 여전히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허망’ 속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면, 저 흘러가버린 처량하고 아득한 청춘을 추구해야 하리라. 그것이 몸 밖에 있을지라도.
루쉰, 꽃이 없는 장미 중 ‘희망’
전시는 루쉰의 발자취를 매우 정직하게 좇는 구성을 보여준다. 샤오싱에서의 출생부터 이후 난징, 도쿄, 센다이, 베이징, 샤먼, 광저우, 상하이에서의 죽음까지, 작가의 생애를 시간 순서 그대로 구성했다.
베이징에서의 루쉰의 첫 거주지는 샤오싱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있던 '샤오싱 회관(绍兴会馆/타지에 살고 있는 같은 고향의 사람들이 설립한 일종의 숙소)'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4년을 지냈다. 이후 1916년에 일본에서 귀국한 동생 저우쩌런과 함께 살 집을 찾았는데 이곳이 샤오싱 회관 바로 근처의 ‘부수수우(补树书屋)’였다. 이곳에서 중국 최초의 현대 소설로 꼽히는 <광인일기>와 <쿵이지>를 집필했다.
이후 1918년 동생이 일본인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돌아와서 더 큰 공간이 필요하게 되면서 '빠다오완(八道湾)' 후통 11호로 이사한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루쉰은 이때 고향 샤오싱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막냇동생 저우졘런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돌아온다. 이 집은 오랫동안 외로움과 싸워오던 루쉰에게 큰 기쁨을 준 곳으로 무엇보다 어머니와 함께 한다는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다. 루쉰의 대표작 <아큐정전>이 바로 이 시기에 나왔다. 베이징 대학과 베이징 사범 대학 등에서 강의도 했고, 좋은 작품들도 대거 발표한 좋은 시기였다.
좋은 시절도 잠시, 저우쩌런의 아내였던 일본인 ‘노부코’로 인해 형제 사이가 틀어진다. 동생에게 절연의 편지를 받은 루쉰은 1923년 '좐타(砖塔) 후통' 61호에 새 집을 얻었다. 이 집은 이전 집에 비해 너무 작았고 당시 루쉰의 수입도 불안정했다. 폐병까지 얻어서 건강도 잃었다. 이때 얻은 폐병은 결국 루쉰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10개월 후 루쉰은 '시싼탸오(西三条)' 후통 21호를 얻어 다시 이사한다. 이 집은 전형적인 사합원이지만 특이하게 가운데 방 뒤로 이어진 곳에 작은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 루쉰은 이 공간에 '호랑이 꼬리'라는 별명을 붙이고 이곳에서 잠을 자고 글을 썼다. 이 방에서 루쉰은 그의 두 번째 소설집 <방황>을 비롯해 <야초>,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화개집> 등 수많은 글들을 썼다. 그리고 연인 ‘쉬광핑’을 만났다.
루쉰은 1926년 쉬광핑과 함께 14년간 머물렀던 베이징을 떠났고, 이후 1939년 10월 19일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쪽 지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후 시싼타오는 궁먼커우얼탸오후통으로 바뀌었고, 1950년 쉬광핑이 이 집과 루쉰의 유품 모두를 국가에 헌납한 뒤 이곳은 박물관이 되었다. 루쉰 탄신 100주년이었던 1981년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이곳은 그가 베이징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공간이자,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주안이 생을 마감한 곳이다. 박물관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다.
박물관 옆쪽으로 걸어가면 루쉰이 베이징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사합원을 만날 수 있다. 집안에 심어져 있는 두 그루의 정향나무는 루쉰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루쉰 박물관에서 조금 걸으면 '바이타쓰(白塔寺)'를 만날 수 있다. 베이징에 두 개의 백탑이 있는데 하나는 베이하이 공원의 백탑과 하나는 이곳 바이타쓰의 백탑이다. 원대 쿠빌라이 황제가 불교로 민심을 다스리고자 창건한 사찰로 중국에서 가장 큰 티베트 불탑 중 하나이자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얀 탑이 워낙 유명해 원래 이름인 ‘먀오잉스(妙應寺)’보다 ‘바이타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1991년 중국 최초의 국가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다. 바이타쓰를 둘러싸고 <莲COFFEE&T>, <熊煮咖啡BearBrew> 등 유명한 테라스 카페들이 몇 개 있다. 백탑을 배경으로 한 인상적인 사진을 건질 수 있는 '왕홍다카디(핫플레이스)'다.
루쉰은 유언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활을 해나가라. 그렇지 않는다면 정말 바보 멍청이이다’
스스로 바보 멍청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희망은 아직 멀고 절망은 늘 가깝지만, 땅 위의 길은 계속 걸어봐야겠다.
베이징_도시산책
도시를 산책하며 마음을 산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