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루이 Oct 23. 2021

어린이라는 온전한 세계

부족한 세계가 아닌 부러운 세계


오랜만에 대형 쇼핑몰에 간 주말, 큰 팬시점에서 심이에게 사고 싶은 것을 사라고 40위안의 금액 상한선을 지정해 주었다. 물통과 열쇠고리 마니아인 아이가 늘 비슷비슷한 품목을 사들여서 가끔 눈을 흘기며 “아니, 집에 비슷한 거 많은데 또 사?”라며 못마땅한 소리를 했더니 아이는 열쇠고리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또 스니커즈 모양의 열쇠고리를 골랐다. 집에 방치되어 있는 열쇠고리들이 생각나서 한 마디 하려는 순간, 아이는 안심하라는 듯 “이거 내 거 아니야, ECA 스니커즈 디자인 코벤 선생님 선물 드릴 거야. 무릎 수술하셔서 위로해 드리는 선물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의 소중한 예산을 쪼개서 선물 아이템까지 맞춤형으로 고른 아이의 예쁘고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못마땅한 표정부터 짓는 못난 어른이 될 뻔한 것이다. 아이는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찰나 내 말을 끊고 빠르게 설명을 끝내는 센스까지 보여줬다. 나는 이미 뭔가 한참은 진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다음 주에는 편의점에서 비싼 ‘다크초콜릿’을 사길래, 별생각 없이 ‘이거 너무 비싸!’라고 했더니 아이는 담임 선생님이 아파서 금요일에 학교에 못 나오셨는데 담임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게 다크초콜릿이라며 자신의 과자는 사지 않더라도 꼭 이걸 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나는 또 한 번 얼굴이 빨개진 채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조용히 계산을 했다. 





심이가 다니는 영어 학원에서 아이들은 수업 과제를 잘할 때마다 보상으로 카드를 획득한다. 학기가 끝나면 학원에서 작은 마켓이 열리는데 학생들은 자신이 그간 따낸 카드로 원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 게임을 워낙 좋아하는 아이라 이 시스템은 심이가 학원 수업을 즐기는 원동력이다. 그런데 최근에 학원에서 받아온 카드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집을 한바탕 뒤졌지만 찾지 못했고 아이는 상심했다. 사실 카드로 살 수 있는 물건들은 기껏해야 형광펜이나 작은 지갑, 노트 등이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까짓 것, 엄마가 사줄게, 집에도 많잖아! 불안해하고 슬퍼하는 아이에게 간편한 해결책을 제시하고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냈다. 


몇 주 뒤 카드를 운 좋게 찾게 되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아이는 뛸 듯이 기뻐했다. 만면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이 제일 좋아"라고 소리를 지르는 거였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내 기준으로 별일 아니라고 치부했던 일이 아이에게는 얼마나 큰 '별일'이었는지 깨달았다. 아이는 자신의 걱정을 과소평가하는 엄마 앞에서 초조한 티도 못 내고 혼자 마음의 짐을 떠안고 있었던 거였다. 한동안 방방 뛰며 좋아하던 아이의 모습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너보다는 내가 세상을 더 잘 알지'라는 건방진 생각이 가끔 나를 찾아오는 순간 아이는 보란 듯이 순수한 마음의 빛을 보여준다. 그럴 때마다 꽤 부끄럽다. 나는 그저 아이보다 조금 더 살아서 삶을 이어나가는 어떤 기술에 조금 능숙한 것일 뿐 마음의 깊이는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다. 


헤어질 때면 아쉬움에 "우리 한 번 꼭 안아보자"라고 말하며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던 너희들~





최근 북튜버 김겨울의 추천으로 읽게 된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에는 내가 심이를 키우며 느꼈던 반짝거리던 순간들과 닮은 장면들이 많았다. 


작가의 말처럼 ‘나 자신을 노인이 될 과도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어린이도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어린이에게는 온전히 그들만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와 비교해서 결코 부족하거나 작은 세계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종종 어린이들의 고민, 생각, 마음들을 쉽게 단정 짓고 무시하는 것일까. 어른들의 세계에서 있는 척, 아는 척하는 사람들을 그토록 싫어하면서 어린이들에게는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서 신발 끈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 거야

그러자 현성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그러면서 칠판에 “서로 몸이 달라도 ---자”라고 썼다. 

내심 존중하자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예지의 답을 기다렸는데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예지야, 그럴 때 ‘무시’의 반대말을 떠올려 보면 좋아”

“아! 알았다!”

유일한 답이라는 듯, 예지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같이 놀자.”

그 순간 나는 예지에게 백오십 번째로 반했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존중’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기회를 줬다. 예지는 이번에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반겨 주자.”

백오십 한번 째로 반한 상태로 나는 두 문장 옆에 각각 하트를 그리고, 조그맣게 ‘존중하자’라는 말도 적었다. 이날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정리하는데, 차마 칠판을 지울 수가 없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람이가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르면서 <에밀과 탐정들>을 꺼내 들고 유심히 살폈다. 

“이 책 재미있어요?” “너무너무 재미있지. 선생님이 엄청나게 좋아하는 작가야. 이 작가 책은 다 재미있어.” 무슨 까닭인지 자람이는 ‘에리히 캐스트너’라는 작가 이름을 종이에 적어서 가져갔다. 그러고는 몇 주 뒤에 내게 선물을 내밀었다. 에리히 캐스트너의 <핑크트헨과 안톤>이었다. 


“선생님이 맨날 저한테 책을 소개해 주시잖아요. 저도 선생님한테 선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책을 샀는데 나중에 형아가 독서 교실 갔다 와서 이 책 독서 교실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도 선생님 드리고 싶어요. 제가 편지도 썼어요”


자람이가 가고 보니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 책이 선생님한테 있잖아요? 하지만 다 똑같은 책이어도 이책앤 제 마음이 있어요.”

‘이 책앤’ 자람이의 마음이 담겨 있다. 나도 마음을 담아 읽을 것이다. 

그러니 똑같아 보여도 다 다른 책이다. 자람이 말이 완전히 맞다. 


<어린이라는 세계>중 발췌




훌륭한 교육법으로 앤드류와 나의 친구들에게 '신사임당 뺨치는 안사임당'이라 불리는 나의 엄마도 당연히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삼당 교육의 놀라운 지점은 늘 자식의 눈높이에서 생각하려 노력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그렇지 못했을 법한 순간이 지나가면 늘 인정하고 사과를 하셨었다. “엄마도 네 나이였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 그 마음을 잘 헤아리지를 못했네, 미안해” 엄마의 이런 담백한 사과를 받아 들고 나는 매우 특별한 기분을 느꼈다. 부모가 나를 잘 돌봐주고 배려해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특별함이었다. 아마도 그런 인정이었을 것이다. 내 세계가 존중받고 있다는 것.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하나의 온전한 세계라는 것. 


속상한 아이가 바라는 것은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건네는 ‘별것도 아닌데 징징대지 마, 옜다 여기 위로’가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세계에서 느꼈던 진짜 기분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다. 어른에게는 큰 의미 없을 작은 일들이 우주처럼 커 보였던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것. 때묻은 어른의 기준으로 ‘울 일 아니야, 신경 쓸 일 아니야’라고 쉽게 판단하지 않는 것. 상하로 놓인 시선이 아니라 평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이동섭은 책 <파리 로망스>에서 이렇게 적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슬픔은 더 슬프고, 우리는 슬퍼질 일은 피하려 든다. 상처를 피해 갈 현명함을 얻는 대가로 순수함을 잃는다. 이제 조금 상처에서 담대해졌다고 좋아하고, 상처를 쉬이 받는 아이를 안쓰럽게만 생각하던 나의 뒤통수를 치는 문장이었다. 나는 어쩌면 순수함을 내어주고 상처를 피해 갈 작은 현명함을 얻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이 작은 현명함을 얻고 일희일비하는 어리석은 어른들의 세계를 지켜줘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어떤 대가를 치러도 되찾을 수 없는 것이 동심이니까, ‘이미 작은 감각들이 무뎌지고 퇴화한 어른으로서 어린이의 세계에 다시 진입하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과 정성'을 들이는 동시에 나는 그저 너의 세계를 부러워한다. 


오늘도 주방에서 우당탕 쨍그랑거리며 음식을 하는 나에게 아이의 따뜻한 한 마디가 날아든다. “엄마, 괜찮아? 안 다쳤어?” 내 존재, 내 상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아이의 마음이다. 아이가 훗날 무언가를 우당탕 쨍그랑했을 때 "또 무슨 사고 쳤어?"라고 윽박지르는 어른이 되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조금 덜 부끄러울 것이다. 아이는 어른의 선생님이라는 진부한 교훈이 살아 움직이는 날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진짜 잘했어'를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