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통과 커피

매일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는 그 순간.

by 심루이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사람은 커피콩을 갈고 뜨거운 물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 옆을 떠나지 않는다. 좋은 눈빛으로 주시하고 집중한다. 그런 사람이 내주는 커피는 이미 마시기도 전에 맛있다는 생각을 머릿속 가득 채워준다. 어떻게 보면 그 좋은 눈빛이 커피에 닿아서일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 이병률


하루의 좋은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계절마다, 시간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하지만 계절과 시간에 상관없이 좋은 순간을 딱 하나 집어보라고 한다면 나는 역시 이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매일 커피 첫 한 모금을 삼키는 그 순간. 맥주도 좋고, 소주도 좋고, 막걸리도 좋지만 커피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김혼비 작가도 그랬더랬다. <아무튼, 술>의 저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둘 중에 꼭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커피라고. '술이 삶을 장식해주는 형용사라면 커피는 삶을 움직여주는 동사'라고. 형용사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동사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따뜻함 혹은 차가움 그리고 원두의 향, 노래와 공간과 사람이 융합된 한 잔의 커피가 내 혀와 목 끝을 적시는 그 순간만큼은 아무도 부럽지 않다. 그러니 나는 매일 커피 한 모금을 삼키는 그 첫 순간을 기다리고, 기억하면서 산다. 그 순간은 하루에 딱 한 번이기에 허투루 결정할 수 없다.


커피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베이징에 와서 커피를 더 사랑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한국에서는 커피 맛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평균적으로 모두 맛있었기 때문이다. 베이징에 처음 떨어진 5년 전만 하더라도 맛있는 커피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산미가 강해서 입맛에 맞지 않았다. 밀크티를 주로 마시는 중국 친구들은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먹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아메리카노가 제일 싸서 그걸 먹는 거지?"라고 물었다. 아메리카노의 쓴 맛이 얼마나 훌륭하고 중독성 있는지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 단념했다. 근데 나 돈 밖에 없는데?


어쨌거나 무언가를 빤 물과 유사한 느낌을 주던 6천 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어본 뒤에야, 작은 유리잔에 담겨 있어 나를 의아하게 만든 8천 원짜리 라테를 먹어본 후에야, 맛있는 커피 한 잔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5년이 지난 지금, METAL HANDS, VOYAGEE COFFEE, BERRY BEANS, Soloist, 大小咖啡 등등 이름만 들어도 믿음이 가는 커피 브랜드들이 베이징에 존재하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커피 맛만큼 중요한 것이 커피를 음미하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 행복을 오롯이 즐기고 싶어서 테이크 아웃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넓고 넓은 베이징 그 어디에서 오늘의 소중한 커피 한 잔을 마주할지는 중대한 문제다. 후통과 카페는 어울리지 않을 듯 매우 잘 어울리는 조합인데 낡은 후통과 감각적인 카페가 만나면 멋이라는 게 폭발하니까. 이제 나는 후통에 숨겨져 있는 어느 카페의 커피 맛으로 그 후통을 기억하곤 한다.


자주 가는 용허궁 근처 우다오잉 후통에 3개가 넘게 생겨버린 메탈핸즈(METAL HANDS). 최근에 생긴 3호점 야외에 마련된 방석에 쪼그리고 앉아 맞은편에서 펄럭이는 노란 이불을 보면서 올해의 첫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더위와 추위, 갈증과 보온의 중간 어디메쯤 ‘아아’에서 ‘뜨아’로 가는 버튼이 있을 텐데 내 친구는 그 버튼을 분실했다. 열이 많은 그녀는 일 년 내내 ‘아아’만을 고집하는 ‘얼죽아(얼어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되시겠다.


'내가 사랑하는 베이징 후통 탑 3'에 늘 이름을 올리는 첸먼다제 근처 후통 양매죽사가(杨梅竹斜街)의 대표 카페 <솔로이스트(Soloist)>의 위치는 특별하다. 이곳 2층 테라스에 앉으면 청말과 민국 초기 베이징의 고급 상업 오락 장소였던 '청운각(青云阁)'이 보인다. 산책을 하면서 이 시대의 건물들이 내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하물며 이곳에서 鲁迅(루쉰), 康有为(강유위), 谭嗣同(담사동), 梁实秋(양실추) 등 당대 유명 인사들이 담소를 나누고 술을 마셨다니 애정 지수가 한껏 상승한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우리 카페는 콜드 브루가 짱이니 그걸 먹어야 후회가 없을 거'라는 사장님의 기세에 팔랑귀인 나는 설득당했다. 커피를 먹으면서 후회라니, 안될 말이다. 후통이 내려다보이는 2층 테라스에 앉아 청운각을 바라보며 12위안이 더 비싼 콜드 브루를 맛봤다. 사장님 말씀대로 과연 후회가 없었다. '나는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활을 해나가라. 그렇지 않는다면 정말 바보 멍청이'라는 유언을 남겼던 루쉰을 떠올려 본다.


솔로이스트 커피에서 나와 아주 좁은 후통 '青竹巷'을 통과하면 찾을 수 있는 주자(朱家) 후통에 베이징의 또 다른 유명 커피 브랜드인 <BERRY BEANS> 전문(前门)점이 있다. 이곳 주자 후통은 빠다(八大) 후통 중 하나인데 빠다 후통은 산시샹(陕西巷), 스터우(石头), 쭝수세졔(棕树斜街) 등 따자란, 첸먼다제 근처 8개의 후통을 아우르는 명칭이다. 한때 이 근처는 300여 개의 기방이 있었던 베이징 최대 홍등가였다. 시와 노래가 끊이지 않던 풍류의 골목의 현재는 서민들이 생활하는 터전이다.


조용한 가운데 아우라를 뽐내고 있는 베리 빈즈는 '网红打卡地'로 소위 말하는 핫플레이스다. 2층 테라스의 지붕 위가 모두가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포토 스폿이다. 햇살을 받으며 오늘의 첫 모금을 마주하고 있는데 '왕홍(파워블로거)'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사합원 지붕에 올라가서 거의 드러누워서 멋진 인증샷을 찍어댄다. 위험천만해 보여 걱정이 되면서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중국인들의 자유분방함에 감탄하게 되는 순간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난다. 그들은 무례함과 자유로움의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체인을 운영하지 않는 후통의 독립(?) 카페들은 자신들의 특색을 더욱 뽐내고 있다. 이름도 맛있는 시청취(西城区)의 양고기, 아니 '양러우후통(羊肉胡同)'에 위치한 카페 <postpost>는 꽁꽁 숨겨져 있어서 15분 동안 근처를 빙빙 돌았다. 헤매다가 후기를 뒤지고 뒤져서 카페 문을 발견했을 때 아무 간판도,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아서 살짝 어이가 없었다. 이 정도면 손님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 간판이 없는 핫플 '힙지로'처럼 아는 사람들만 찾아오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58'만이 선명하게 쓰여 있는 문 앞에서 가뿐 숨을 몰아 쉬며 마스크를 살짝 내려보는데 폴폴 풍겨오는 향긋한 원두향. 마스크를 벗고 걸었다면 진작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쩝. 들어가 보니 새 세상이다. 편집 샵도 함께 있어 기대보다 훨씬 컸고 내가 좋아하는 필름 카메라들이 잔뜩 있어서 구경하느라 한참의 시간을 소비했다.


'츠니엔뎬후통(车辇店胡同)'에는 아주 깜찍한 카페, <苦尽咖啡+coogilla>가 있다. 이 카페의 후기를 찾아보면 '바이두 지도가 이상한 곳을 가리켜도 굴하지 않고 직진하라'는 말이 계시처럼 쓰여 있다. 진짜 이곳이 맞나? 의심을 백번 정도 하다 보면 후통 끝에서 이런 곳을 만날 수 있다. 각종 피규어의 대향연이 펼쳐지는데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곳에는 '뜨거운 물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 옆을 떠나지 않고 좋은 눈빛으로 주시하고 집중하는' 바리스타가 있었다. 그런 사람이 만들어 주는 한 잔의 커피는 내 하루에 생기를 더해줄 수밖에.


김혼비 작가가 코로나로 인해 두 달간 접어버린 운동을 다시 시작한 이유는 격렬한 운동 끝의 시원한 커피가 격렬하게 마시고 싶어서였다. 나도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후통을 걷다가 커피를 마시는지, 커피를 마시기 위해 후통을 걷는지 헷갈릴 때도 있다. 뭐 어쨌거나 괜찮다. '여전히 엉망진창인 하루를 보내다가도 저녁에 자전거를 탄 뒤 마실 끝내주는 커피를 생각하면 아주 망한 날만은 아닐 것 같은 조그만 위안이 생긴다. 오늘도 이렇게 무사히 원두를 갈고 있는 한 나는 괜찮을 것이다'라는 작가의 고백처럼 우리는 모두 괜찮을 것이니까. 쓰다가 시다가 가끔은 달달한 인생을 닮은 이 한 잔의 커피와 함께라면.


2019-09-18-13-50-40.jpg
2019-09-18-13-19-44.jpg
후통과 커피
2019-09-18-14-14-24.jpg
2021-12-06-13-54-19.jpg
mmexport1634042066108.jpg 후통, 커피 그리고 빨래
2021-03-23-15-02-23.jpg
2021-06-08-13-14-45.jpg
Soloist와 청운각, 드러누워야 하는 BERRY BEANS 전문점의 지붕
2021-12-02-13-41-51.jpg
2021-12-02-13-42-12.jpg
아무 것도 없는 58호... 실화입니까.
2021-12-02-13-43-00.jpg


2021-09-06-13-52-44.jpg
2021-09-06-13-53-16.jpg
의심하지 말고 걸어라!!!
2021-09-06-13-54-25.jpg
2021-09-06-13-55-12.jpg
그러면 새 세상을 만날 것이니~


---

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이전 04화후통과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