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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Dec 09. 2021

243일 만의 귀환

이 죽일 놈의 코로나

오늘은 우한의 홍보 영상 한 편을 보았는데, 제법 잘 만들어진 영상이었다. 광활하고 평온한 우한이라는 도시에 ‘일시정지 버튼이 눌렸다”고 표현했다. 그래, 우한은 일시정지 상태가 됐다. 하지만 시신용 비닐팩에 담겨 실려간 사람들은, 완전히 끝났다. 


팡팡, <우한일기>, 69


2년 전 오늘,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이제 곧 엄청난 전염병이 돌 텐데 그 병으로 전 세계적으로 500만 명이 넘게 죽을 거고, 아무도 자유롭게 국경을 넘을 수 없을 거야. 무엇보다 너는 이제 평생 마스크를 쓰고 살게 돼’라고 한다면? 귀싸대기를 때리면서 뭔 개소리야!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개소리가 아니었고, 나는 베이징 어딘가에서 마스크를 쓰고 헉헉거리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타국에 사는 건방진 이방인에게 코로나란 녀석은 조금 더 극적이게 다가왔다. 작년 1월 중순, 손녀가 보고 싶어 병이 난 할머니를 위로하고자 서프라이즈 이벤트로 4박 5일의 짐을 챙겨 서울로 떠났다. 그리고 그 이후 믿을 수 없게도 떠돌이처럼 떠돌다 9개월, 정확히는 243일 만에 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겪은 인생의 희로애락은 알코올 없이 맨 정신으로는 이야기하기 힘들다(그래서 지금도 맥주를 마시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하루아침에 도시 전체를 셧다운 해버리고 문을 열어주지 않던 베이징은 이별을 이야기할 듯, 계속 만나줄 듯 희망 고문하는 첫사랑과도 같았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2020년의 내게는 ‘이번 주에는 집에 가겠지’라고 희망에 찼던 34번의 월요일이 있었고, ‘아, 이번 주에도 못 갔네’라고 실망했던 34번의 일요일이 있었다. 잠자리가 자주 바뀌던 탓에 매일 아침 눈 뜨면 ‘여기가 어디지?’라고 머리를 굴려야 하는 로딩 시간이 있었고, 아이 이러닝을 함께 하다가 인내심과 영어가 늘고 있는 철없는 자아가 있었다. 




2020년 1월, 아이와 단둘이 감행한 ‘서울행’ 이벤트는 성공적이었다. 손녀를 본 할머니는 활력이 넘쳤다. 그런데 친정에서 하루 종일 이어지던 코로나 특집 방송을 보다 보니 조금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괜찮은 거겠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손톱을 질겅질겅 씹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때 우리 일정은 짧은 서울 나들이를 끝내고 홍콩에서 남편과 아이 친구를 만나 4박 5일간 여행을 한 뒤(우리의 목표는 디즈니랜드였다) 베이징으로 올라가는 거였다. 하지만 며칠 사이 분위기는 급박하게 변했다. 우리는 홍콩에 가도 될지 토론했는데 나는 부정적이었고, 미리 홍콩에 가 있던 남편은 괜찮으니 오라는 입장이었다. 비행기 이륙 7시간 전까지 갈팡질팡하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그래, 될 대로 돼라! 잘못되면 다 남편 책임!’이라는 상큼한 마인드로 손님이 열 명도 채 되지 않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세기에 탄 것처럼 좌석 4개를 차지하고 누워 있는데 또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착륙해서 짐을 찾고 나가보니 남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가 말했다. 


-1시간 전에 디즈니랜드가 폐쇄됐어.


젠장! 이럴 줄 알았다고!!! 내가 안 온다고 했잖아~~~~라고 공항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분노보다 더 큰 건 두려움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공항 철도 차창으로 보이는 홍콩 거리는 음산해 보였다. 평소 멋있다고 극찬했던 번체로 쓰인 간판들까지 스산했다. 우리는 호텔에 박혀서 딤섬 따위를 먹으며 추이를 지켜봤다. 세 번째 이상한 예감이 찾아오기 전에,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회사에서 돌연 주재원 가족 전원 귀국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 홍콩에 내린 지 3일 만에 다시 아이 손을 잡고 인천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1월에만 세 번째 비행이었다. ‘이 정도면 월드 투어 스케줄이군’이라고 우쭐하며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잠시 한국에 함께 있었던 남편을 혼자 베이징으로 보낼 때의 인천 공항이 생각난다. 아무도 없는 공항은 마치 거대한 우주선 같았다. 그 우주선 속으로 남편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는데 눈물이 났다. 가족을 우주로, 아니 전쟁터에 보내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곧 한국이 전쟁터가 되어 버려서 상황은 역전되었지만. 




어쨌거나 회사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호텔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호텔은 언제나 잠시 머무르는 곳이었는데 졸지에 삶의 터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이는 호텔 식당의 종이컵을 직원보다 더 빨리 찾아내서 직원들을 놀라게 했고, 호텔 방을 배경으로 온라인 러닝을 했다. 9개월 동안 이 호텔, 저 호텔을 전전하면서 지냈다. 지원 규모는 갈수록 줄어들어서 우리 객실 또한 갈수록 작아졌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를 맞아 큰 집에서 단칸방으로 옮겨 가는 가족의 모양새였는데 똑똑한 심이 친구는 “엄마, 우리 집 파산한 거야?”라는 어려운 단어를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기특함을 보여줬다. 우리는 두 명이니 비좁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와 샴쌍둥이처럼 하루 종일 붙어 있다 보니 화가 날 때 도망칠 공간이 없어서 괴로웠다. 화를 삭일 땐 호텔 화장실 변기 뚜껑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이의 온라인 라이브 수업이 매일 진행되면서 좁은 객실에서 살짝만 움직여도 내 모습이 스크린에 잡혔는데 당시 아이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엄마, 스크린에 나와, 움직이지 마!”였다. 나는 스크린에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에 옷장처럼 앉아서 책을 읽었다. 화장실이 급할 땐 네 발로 기어서 갔다. 


그래도 곧 내 집에 갈 수 있다는 기대로 옷도 사지 않고 버텼다. 이미 늘어나버린 짐을 더 이상 늘이지 않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였다. 코트를 입다가, 점퍼를 입고, 급기야 반팔 티를 입어야 하는 여름이 도래했다. 맨날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나를 놀리는 친구에게 말했다. 나 다음 주에 돌아갈 거거든. 


매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코로나 관련 뉴스를 읽고, 짬이 날 때마다 ‘베이징 셧다운’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 확인했다. 잠들기 바로 전까지 그런 패턴은 계속됐기에 나는 하루아침에 이산가족에다, 재난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코로나 블루,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이의 감정도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는데 ‘딸등신’인 아빠를 많이 보고 싶어 했다.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신나게 놀다가도 친구 아빠를 보면 방에 혼자 들어가서 훌쩍이며 울었다. 그런 아이를 보면 나도 울고 싶었다. 




8월! 드디어 베이징 문이 열렸고, 회사에서 전세기를 띄운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뛸 듯이 기뻤는데 하필 그 주에 폭풍이 와서 전세기가 취소됐다. 그땐 하늘이 무너져 내리면 어떤 기분인지 깨달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다음 주에 바로 비행 스케줄이 잡혔다. 면봉을 코를 통해 뇌에 갖다 대는 듯한 코로나 검사를 끝내고 귀국 날만을 기다리는데 그때는 정말 하루가 일주일 같았다. 자꾸 몸에서 열이 나는 착각이 들어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와 내 이마에 체온계를 댔다. 내가 혹시 코로나 무증상자라면… 나로 인해 비행기에 탄 모든 인원이 병원에서 격리해야 한다면…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가 내 맘을 옥죄고 있었다. 그때 무서웠던 건 코로나가 아니라 지금이 아니면 영영 내 집으로 못 돌아갈 것 같은 불안감, 혹은 낙인의 공포였던 것 같다. 


19년도에 리모델링을 했다던 격리 호텔은 어떤 의미로서는 대단했다. 평생 식욕이라는 걸 잃어본 적 없는 나의 식욕을 앗아갔다. 바닥에 깔린 암적색 카펫엔 찍찍이 3개를 써도 해결되지 않는 머리카락이 있었고 어느 객실에서는 노린재가 끊임없이 나온다고 했다. 발을 디뎌야 하는 부분에는 전부 돗자리를 깔고 까치발로 잽싸게 뛰어다녔다. 그러니까 거의 2주 동안 침대 위에서 생활하며 ‘2019년이 아니라 1919년에 리모델링을 한 게 분명해’라는 농담으로 버텼다. 하는 일 없이 3끼 도시락을 먹고 있으니 돼지가 되는 기분이었지만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배가 고팠다. 그래도 나의 집이 있는 베이징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호텔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지만, 정문에서 구호 물품을 들여보낼 수 있었던 남편은 우리 방 창문과 몇 백 미터 떨어진 호텔 정문에서 미친 듯이 손을 흔들었다. 8개월 만의 인사였다. 


호텔에서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벤트들이 있었다. 우선 심심한 아이들을 위해 ‘레고’가 제공됐다. ‘코로나와 격리 생활’을 주제로 사생대회도 열렸다. 심이는 시간대별로 우리가 방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주 세세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안 그리고 왜 일기를 쓰냐는 나의 타박에는 ‘밖에 계신 직원분들이 매우 궁금하실 것 같아서’ 그린다고 했다. 이 비대한 자아를 가진 녀석 같으니라고. 세상은 그렇게까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창문을 바라보는 아련한 뒷모습 아래 ‘세상이 그리울 땐 창문을 본다’고 적혀 있던 한 아이의 그림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정말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돗자리 위에서 까치발을 하고 창문 너머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243일 만에 베이징의 내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남편은 ‘WELCOME BACK’이라는 가랜드를 준비해두었다. 웰컴백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슬프고 뭉클할 일인가. 근데 정말 그랬다. 전에는 몰랐다. 내 집에서 두 발 뻗고 잠드는 일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은. 한동안 나는 여전히 아침에 눈 뜨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로딩 시간을 가져야 했지만 우리의 베이징 일상은 금세 비슷하게 흘러갔다. 


2년 전 오늘의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뭐였을까? 아마도 매일 공부해도 늘지 않는 중국어나 화장실 곰팡이를 없애는 방법, 연습이라고는 하지 않는 아이에게 비싼 피아노 레슨을 계속 시켜야 하나 정도가 아니었을까? 가끔 일상이 지루해질 땐 인천에서 베이징으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창공의 풍경을 더듬어본다. 내 생애 가장 어렵고, 간절했던 비행을. 


코로나는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또 많은 것을 알려줬다. 일상과 삶의 소중함. 힘든 시기에 우리를 살리는 다정과 환대의 가치에 대해서. 나는 잘 살아가고 싶다. 잘 생존하고 싶다. 이 시기를 통과하며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으니까, 꼭 그럴 테다.

비행기의 창공과 격리 호텔에서 바라본 하늘
격리 사생대회 출품작/멀리서 손 흔드는 남편
9개월 동안 붙어 있던 파란색 풍선과 웰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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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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