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루이 Nov 26. 2021

3개 국어는 먹는 건가요?

'我的 eyes가 아파요’, ‘I 去 학교!'가 난무하는 세상

이야기 자체는 상당히 흥미롭지만, 가만히 두 시간 정도 듣다 보면, 신경이 피로해지고 이완되어 버린다. 신경이 이완되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내가 하는 영어도 점점 이상해진다. 소위 ‘배터리가 나간’ 증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윽고 슬픈 외국어>, 169p


-어머, 심이는 한국어, 중국어, 영어를 다 잘할 테니까 정말 좋겠다.


다섯 살부터 베이징에서 자란 심이를 보며 몇몇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농담처럼 던지지만 진담이어서 제일 슬픈 이야기는 ‘실은 3개 국어가 다 엉망진창’이라는 발언이다. 다름 아닌 0개 국어의 비극. 실제로 그렇다. 


베이징에 오기 전 국제 학교를 다닐 테니 영어는 기본으로 하고, 베이징에 사니까 중국어도 웬만큼 되겠지 기대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모국어조차 익숙하지 않은 다섯 살 아이에게 준비해야 했던 건 철없는 기대가 아니라 성숙한 염려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영어와 중국어에 동시에 노출되자 3개 국어 혹은 2개 국어를 한 문장 안에 집어넣어서 말하는 놀라운 기술을 보여줬다. ‘我的 eyes가 아파요’, ‘I 去 학교’ 등등.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고 웃었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어 학습에 열 올리고 있던 내게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아이 선생님과 영어로 상담을 하는데 나의 짧은 영어에 자꾸만 중국어가 섞였다. 중국어로 ‘She’를 ‘타(她)’라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타 said’, ‘타 believe’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던 영국인 선생님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Who is TA?


게다가 'apply'나 'homework' 같은 아주 쉬운 영어 단어도 생각나지 않아서 정말이지 당황했다. 말을 할 때 머리에 말하고 싶은 적확한 단어가 빠르게 떠올라야 입으로 말할 수 있을 텐데 내 두뇌 속에 언어별 수납공간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국경을 넘나들며 아무 단어가 떠올랐고, 내 입은 아무 말이나 지껄여 버렸다. 모국어가 탄탄하게 잡혀 있는 내가 이 지경인데 한국어조차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이는 오죽할까 싶었다. 




아이는 3개 국어의 굴레 안에서 다양한 문제들을 겪게 되었다. 유치원을 다닌 이후 주말과 방학을 싫어할 정도로 유치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대부분 중국 아이들로 이루어진 반으로 옮겨야 했을 때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등원 시간, 아이를 들여보내고 바로 돌아서는 평온한 중국 엄마들 사이에 껴서 아이를 다독이다가, 거래도 해보다가, 사정하다가 화도 내봤지만 실랑이는 끝날 기미가 없었다. 우는 아이를 힘겹게 떼어 놓고 뒤돌아서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심란해져서 바로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말풍선이라는 게 일상에 존재한다면 중국어 말풍선이 몇 천 개쯤 떠다니는 공간에서 혼자 외딴섬이 되어 있을 아이를 생각하니 눈물부터 쏟아졌다. 모두들 어디론가 활기차게 출발하는 이른 아침의 거리에서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며 질질 짜고 있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몇 주 뒤 조금 적응을 하나 싶던 심이는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읽어 준 중국 동화를 자기만 못 알아 들어서 너무 슬펐다고 했다.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얼른 중국어 선생님을 알아봐 달라던 여섯 살의 아이. “걔네도 한국어 하나도 몰라, 너무 속상해하지 마” 따위의 남루한 위로를 건네는 엄마가 바로 나였다.  


기본적인 영어와 중국어는 서서히 익숙해졌지만 아이의 고군분투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었던 것 같다. 중국인이 대부분이었던 국제 학교에 입학하고, 2학년에 올라가던 무렵, 무섭기로 소문난 담임 선생님 반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배정됐다. 아이는 또다시 모든 게 낯설다며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무섭다고 했다. 가끔 고속도로를 달려 학교 안 이층 카페에 앉아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를 훔쳐보기도 했다. 아이는 중국 친구들 사이에서 가끔 외롭게 서성이고, 놀고 싶은 무리에 끼지 못해 쭈뼛거렸다.  


교실 문을 열고 당당하게 들어갈 용기가 생기자 아이는 모든 활동에 열심히 참여해서 학생회 멤버가 되었다. 한시름 놓았다고 안심하고 지내던 어느 날에는 한 중국인 친구가 자기 앞에서 일부러 빠르게 중국어로만 말하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한국인인 자기와 놀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을 전해줬다. 침대에 누워서 울먹이는 아이를 보는데 '이것이 말로만 듣던 따돌림인가?' 싶었다. 'TA'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던 선생님에게 백 번도 더 수정한 메일을 쓰고,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아이를 다독였지만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타국 생활은 아이에게 훌륭한 커리큘럼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어린 나이에 굳이 받지 않아도 되는 소외감과 크고 작은 상처들 또한 동시에 안겼다. 그 이후로도 하나가 해결되면 다시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는 식으로 고민해야 할 일들은 쭉 이어졌는데 가끔은 결승선이 없는 장애물 경기를 뛰고 있는 기분이었다. 




E 언니가 학교에 자원봉사를 하러 갔더니 안면이 있던 한국 아이가 신나게 운동장을 뛰고 있었다. 언니는 반가운 마음에 “안녕, 재미있게 놀고 있네”라며 아는 척을 했다. 아이는 “아, 지금 할 게 없어서 그냥 혼자 뛰고 있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예상 밖인 아이의 대답이 웃겨서 깔깔거리는데 이상하게 우리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남편은 회사에서, 아이는 학교에서, 나는 생활에서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함께였지만 서로가 겪고 있는 분투의 깊이를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가끔 잘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일이 다 알았다면 우리는 너무 슬퍼서 눈물의 바다에서 익사했을 것이 분명하니까.  


한국어가 서툴던 아이는 뜻밖에도 '어깨에 담이 들었다'라는 어른스러운 어휘를 자주 구사했는데 실제로 아이와 내가 종종 담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어가 엉망이던 베이징 생활 초반 2년 동안은 길을 걸을 때도,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언제나 긴장 상태여서 몸의 근육이 계속 굳었다. '나의 외국 여행은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며 '그건 여행이라기보다는 영문도 모르고 그냥 어딘가에 떨어지는 일에 가깝'다고 김연수 작가가 그랬었는데 우리의 베이징 생활이 그런 편이었다. ‘일어난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넘겨짚고, 현지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여행자'라던 부분에서도 뜨끔했다. 여행자와 생활인의 중간에 있던 나도 그랬으니까.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누군가의 공격에 항상 대비하는 사람처럼 주위를 살피고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을 만큼 아이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담이 오던 이방인은 일 년에 한두 번 친정에 가면 긴장감이 풀려서 신생아처럼 열다섯 시간이 넘게 자거나, 앓아누웠다. 



낯선 언어의 세상에서 돌아온 아이의 얼굴에는 늘 고단함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제일 고군분투하고 있었을 남편 춘.
내가 고작 할 수 있었던 작은 위로들, 사랑해라는 말

----

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이전 22화 씽바커에서 메이쓰를 먹는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