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이 결국 내 삶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가 구조주의를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 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서울의 한 동네에서만 지내다 대학교도 비슷한 곳으로 갔다. 직장도 마찬가지였다. 종종 희한한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똘+I’ 같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환경적으로 나는 더 이상 평범할 수 없는, ‘모범생 피가 좔좔 흐르는’ 온실 속 화초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연히 대학에 가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번듯한 회사에 취직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적당한 시기에 결혼하는 인생의 사이클. 나와 비슷한 친구, 동료들과 늘 함께였기에 내가 얼마나 편견에 갇힌 사람인지 모르고 살았다. 전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베이징에서 알게 되기 전까지는.
어학당에는 나와 동갑인 한국인 남자 친구 C가 있었다. 유럽이나 남미에서 온 젊은 친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인 엄마들로 이루어진 반 구성이었기에 C를 처음 봤을 때 ‘학생도, 주재원도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 뭐 하는 거지?’라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함께 식사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휴대폰 판매 대리점을 운영하다가 중국에 미래가 있을 것 같아서 대리점을 정리하고 베이징으로 건너온 것이다. 그의 대단한 용기에 감탄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조금 친해진 느낌이 들어서 조심스레 나이를 물었다. 여러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나와 비슷한 나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C가 태어난 연도를 이야기하는데 띵동. 역시 나와 같은 나이였다. 베이징에서 동갑인 남자 사람 친구를 학교에서 만난다는 건 ‘이곳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 베스트 5’ 안에 들 것 같은 느낌이라 나는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버렸다.
-너도 01학번이구나!
근데 순간 C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곧이어 흥분이 내장 속으로 가라앉고 내가 금방 범한 줄도 모르고 범했을 실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이어지는 친구의 대답은 역시 그 가능성이었다.
-아, 우리가 01학번인가? 나 사실 대학교를 안 나와서 학번을 잘 몰라.
완러완러완러(完了_망했다). 이미 늦었다. 친구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서 더 민망했다. 예전 배우 박정민님의 책에서 밑줄 그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내비게이션 목적지에 ‘쥐구멍’이라고 치고 그곳으로 사라지고 싶다.
그날의 에피소드는 내가 얼마나 많은 보편적 편견 속에 파묻혀 살아왔는지 여실히 드러냈다. 부끄러워서 그 날밤은 잠을 설쳤다. 편견투성이의 생각을 품고 있었던 과거의 못난 나와 이별하려면 꽤 긴 사투를 벌여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시작해야 했다. 섣부른 추측과 수다를 줄이고, 다른 이들의 말을 더 많이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타국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무수한 편견과 싸우는 일이다. 베이징에 오기 전 나는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서도 많은 편견이 있었다. 키가 작을 것 같았고, 중식은 기름을 많이 이용하니 뚱뚱한 사람이 많을 것 같았으며, 도시 조경은 삭막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중국 북방계 사람들은 특히 큰 편이라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나보다 키가 크고(참고로 내 키는 173센티미터이다), 자세가 좋아서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중국 할머니들이 많다.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내 키가 튀지 않고 묻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나무와 공원은 왜 이렇게 많은지. 베이징에 처음 놀러 온 친구들은 "길에 나무가 왜 이렇게 많아?"라고 묻는다.
나의 편견을 깨뜨린 또 하나는 남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중국 사람들의 자유분방함이었다(정치적인 부분은 물론 제외다). 뿌리 깊은 유교 사상과 체면(面子)을 중시하는 문화라 남의 눈치를 많이 볼 줄 알았는데 와서 경험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우리처럼 격식을 차려서 제사를 지내지도 않으며, 사람의 나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이곳에는 오직 ‘펑요(朋友)’만이 있다. 베이징에 와서 나이를 물어보며 서열을 정리하려고 하는 버릇을 고쳤다. <중국인은 왜 시끄러운가>의 저자 오영욱은 “중국 사람들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해?”라는 친구의 질문에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대답한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지
실제로 살아보면 더 절실하게 공감할 수 있는 대답이다. 예전에는 그런 중국인의 면모를 무례함이라고 느꼈는데 오래 지켜본 지금은 부러움이 섞였다.
매일 아침 공원이나 단지 호수에서 군무를 추고, 노래를 하는 수많은 중국인들을 본다. 화려한 옷을 입고 한 마리의 학처럼 유유하게 춤을 추는 할머니,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듯 집중해서 칼 춤을 추는 할아버지, 호쾌하게 왈츠를 추고 있는 아저씨, 아주머니 커플들을 시도 때도 없이 만나다 보면 나조차도 자유로워지는 기분이다. 그래, 남의 시선 따위가 뭐라고. 나만 즐거우면 되지. 처음에는 광장무 행렬에 합류하기가 주저됐지만 요즘은 아이와 함께 끝에 나란히 서서 리더의 춤사위를 살피며 몸을 자유롭게 움직여 본다. 그때 나의 시선은 다른 이의 눈빛이 아니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살아간다는 감각에 집중되어 있다.
<카페에서 때수건을 팔라고 하셨어>를 읽다 보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저자가 있었다. 그는 카페를 오픈하고 단골손님들과 독서 모임을 시작한다. 책 감상을 이야기하다 ‘부모님 하면 생각나는 음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한 회원은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그런 음식이 없었다. 이 짧은 대화를 통해 저자는 본인이 얼마나 보편적 편견에 갇혀 살아왔는지 깨닫는다. 저자의 모습과 같은 학번이라고 물개 박수를 치던 철없던 그날의 내가 자동으로 오버랩되면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상대에게 칼날이 될 수 있는 질문을 건넬 시간에 굳어져 버린 편견을 점검해 보자고.
베이징에서 살지 않았다면 이런 기회들은 조금 더 천천히 다가왔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예 그럴 기회조차 없이 바쁨을 미덕으로 살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조금 아찔하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세상의 진짜 모습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장석훈의 <생각의 말들>에서 가장 공감한 문장은 이것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격과 삶의 격이 천 갈래, 만 갈래 갈린다. 결국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며 사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니 나의 생각들은 결국 내 삶이 된다. 함부로 아는 척하지 않고,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나를 꿈꾼다.
---
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