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중국 사람 아니죠, 여권 내나 봐!
지난 밤 꿈에서 나는 프랑스인이 되었다.
윌리엄 알렉산더, <나이 들어 외국어라니>, 11p
언어 교환 앱 ‘헬로우 톡(HelloTalk)’을 통해 만난 중국 언니 한 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언니로 말할 것 같으면 몇 년 전 우연히 한국어에 빠진 이후 일 년간 아이를 친정 엄마와 남편에게 맡기고 연세대학교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시단(西单)에 위치한 거대한 쇼핑몰에서 언니를 처음 만난 날, 그 이야기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그저 한국어가 좋아서 세 살짜리 아이를 맡기고, 혼자 낯선 나라에 가서 어학당에 다녔단 말이야? 그게 가능해?
언니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언니의 한국어 사랑은 넓고도 깊었는데, 어느 날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이런 말도 했다.
-한국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는 잘 모를 거야. 빨갛다는 표현이 얼마나 다양해? 붉다, 새빨갛다, 불그스레하다… 한국어 표현은 정말 다채롭고 아름다운 거 같아.
나름 국문학과 졸업생으로 한국어와 친하게 지내왔지만 사실 한국어가 다른 언어에 비해 뛰어나게 아름답다고 여기지는 못한 데다 이런 대화를 중국인과 나누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예상한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거의 반쯤은 우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요즘 중국어에 빠져 있어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잊고 살았어. 맞아, 한국어가 진짜 아름답지. 근데 중국인이 내게 이런 깨달음을 주다니 신선한 충격이다.
사랑과 애정의 깊이만큼 언어는 유려해지기 마련이니 그런 마음을 가진 언니의 한국어 실력은 굉장했다. 처음 만났을 때 “언니 중국 사람 아니죠, 여권 내놔봐” 할 정도였으니까. 언니가 한국어로 말하면 나는 중국어로 대답하는 다소 기이한 수다가 줄곧 이어졌다. 익숙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신기한 관계였고 그런 사이였기에 더 부담 없이 내밀한 대화를 나눴다. 아름다운 한국 드라마의 영향 때문인지 언니는 자상하고 따뜻한 한국 남자에 대한 환상이 있었는데, 내가 드라마 캐릭터일 뿐이라고 어깃장을 놔도 일찍 결혼하지 말고 한국 남자를 만날 걸 그랬다며 종종 아쉬워했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중국인들이 ‘헬로우 톡’에 다양한 질문들을 업로드한다. ‘나 국문학과 출신이라 이건 내 전문분야인데’ 흐뭇해하며 질문들을 쓱 보는데 웬걸, 너무 어렵다. ‘도대체’랑 ‘도무지’는 정확히 어떤 의미예요? ‘오지랖’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이런 질문을 앞에 두고 있으면 멍해져서 몇 번이나 댓글을 썼다 지웠다 했다. 문학을 좋아했을 뿐 제대로 언어학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나는 그저 한국어가 모국어인 평범한 한국인일 뿐, 결코 유능한 선생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에는 욕심내지 않고, 어색한 예문을 매끄럽게 고쳐주는 선에서 소통을 마무리했다.
어학당에서 매 학기마다 발간하는 학급 문집에 글을 쓰기로 했다. 부산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A4용지 한 장이 넘는 짧지 않은 글이었다. 딱 봐도 문법 오류가 엄청나 보였다. 전부 수정하지는 못하겠지만 기초적인 실수는 피하자는 심정으로 ‘헬로우 톡’에 S.O.S를 쳤다. 누가 내 글 좀 읽고 고쳐줘요오~ 생각보다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지적할 것이 너무 많아서 시스템 오류에 걸려 버린 건가, 걱정하던 와중에 댓글이 달렸다. 기쁜 마음에 바로 확인한 결과, 누군가 이런 댓글을 남겼다.
-문법의 오류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의 글에 감동받아서 울 뻔했다. 언어는 그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는 도구일 뿐이며, 다른 사람이 읽고, 이해하고, 감동받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 깊은 새벽,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해 줘서 고맙다.
갑자기 울컥했다.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다. 고맙고 궁금한 마음에 상대방 프로필을 확인해 봤더니 비행기로 3시간도 더 걸리는 윈난 성에 사는 스물다섯 살의 어린 친구였다. 문법 오류가 넘쳤을 나의 글을 마음을 다해 읽어주고 감동해 준 어느 중국인이 이 넓은 땅덩어리에 있다니. 그녀의 다정한 마음이 내게 닿았다. 역시 진심은 완벽한 언어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외에도 좋은 중국 노래 알려줘, 기사 읽는 방법 소개해줘, 신조어 알려줘, 너희는 무슨 APP 쓰니, 무슨 차와 과자 먹니 등 나의 질문 리스트는 끝이 없었다. 한국 아줌마의 왕성한 호기심을 무시하지 않고, 귀한 시간을 내어 친절하게 댓글을 달아주는 중국 친구들이 많았다. 생각보다 늘지 않는 중국어에 조바심도 나고, 가끔은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도 굴뚝같았지만 얼굴도 본 적 없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기대어 나의 중국어는 지속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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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