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이고 생산적인 덕질의 세계
이따금 제 인생이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 좋아했을 뿐인데, 그것들이 지금 제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으니까요.
정지혜, <좋아하는 마음이 우리를 구할 거야>
중국어를 시작하면서 한동안 중국 드라마(이하 중드)에 미쳐 있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울고 웃으면서 봤다. 서른다섯에 중국 남자에게 설렐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그럴 수 있었다. 처음으로 본 중드는 ‘환러송(欢乐颂)’. 무뚝뚝하기만 하던 ‘등륜(邓论)’이 여자 주인공에게 “为了你, 我愿意(널 위해서라면 난 기꺼이 할 수 있어)”라고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악’ 소리를 질렀다. 간질간질 설렜다. 내가 좋아하는 극중 커플이 헤어지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사전을 뒤져서 번역을 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연애와 결혼, 회사 생활에 관한 중드는 대부분 주인공이 여자여서 멋진 남자 배우 찾기가 쉽진 않았지만 ‘중국 남자들은 요리도 잘하고 가정적이라던데’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함께라 이미지는 부풀려졌다. 우리끼리는 ‘쩐머러(怎么了)’의 마법이라고 불렀다. 굉장한 저음 보이스와 그윽한 눈빛을 가진 배우가 위기에 빠진 여자 주인공을 찾아와 모든 일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뉘앙스로 “쩐머러(무슨 일이야)”라고 나지막이 읊조리면 ‘꺄’ 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마법. ‘나만의 쩐머러’를 찾아 새벽 2-3시까지 중드를 보다 휴대폰을 얼굴에 떨어뜨린 적도 여러 번이다. 재미있게 본 중드 중 하나인 <누나의 첫사랑>에서 얼굴 천재 ‘송위룡’을 만났을 때는 한국에서도 하지 않았던 덕질을 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연기력 논란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여러분, 연기는 얼굴로 하는 겁니다. 암요.
베이징에서 만난 언니 S는 배우 L에게 진짜 덕질을 시작했다. 우선 그가 출연한 모든 작품과 광고 영상 등을 섭렵했고, 그를 다룬 잡지 인터뷰들을 빠짐없이 읽고 꼼꼼하게 번역했다. 그가 추천한 노래와 음식, 책들도 찾아서 듣고, 맛보고, 읽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중국어가 일취월장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멋진 곳을 찾았다고 흥분한 언니를 졸졸 따라가 보면 그가 SNS에 올린 거리 혹은 화보를 찍은 가게였다. “어떻게 이렇게 귀신같이 찾아내요, 신기하다”는 내게 언니는 가게 이름을 찾기 위해서 화보 촬영 동영상을 백 번 정도 돌려봤다고 했다. 언니는 그의 SNS 사진과 정확히 일치하는 ‘스폿’을 찾아서 그의 굿즈(대부분 그가 나온 엽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나도 언니의 덕질 생활 덕분에 베이징의 숨은 명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덕질이 우리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에는 이런 문자가 왔다.
-저 지금 공항 가는 중이에요. L이 오늘 베이징 들렸다가 다른 데로 간다고 해서요.
哇塞! (와싸이_우와!라는 감탄사) 불확실한 정보를 믿고 공항에서 대기 타는 행위는 덕질의 끝판왕 아닌가? 마흔이 넘은 외국인을 이른 새벽 공항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덕질의 세계였다. 나는 그 세계에 여러 번 감동했는데 그중 제일은 ‘그의 훌륭한 생각들’을 유려하고 자연스럽게 번역하기 위해서 고심하고 또 고심하는 언니의 모습을 볼 때였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HOT’ 오빠들의 팬픽(Fan+Fiction)을 쓰다 작가의 재능을 발견한 성시원 이후 이렇게 생산적이고,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덕질은 처음이었다. 이 정도면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에서 정지혜 작가가 BTS를 향한 덕질이 자신의 삶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고 한 고백도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작가는 말했다. ‘고집 세고 편협한 우리를 이토록 쉽게 설득할 수 있는 건 역시 오직 사랑’뿐이라고. 진짜 그랬다. 코로나 블루도 뿌리칠 정도로 열정적인 에너지를 뿜뿜하게 하는 것. 남의 도시, 베이징을 열 배로 더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나도 당장 풍덩 빠져버리고 싶은 덕질의 세계!
덕질을 시작한 뒤로 저 역시 다양한 감정을 새로이 배웠습니다. 방탄소년단 멤버의 생일에 덕메들과 함께 이벤트 장소를 쏘다니며 어른이 되어서도 순진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눈치 보며 살기 바빴던 내가 마음 가는 대로 공연을 즐기며 ‘자유롭다’라는 감정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몸으로 느꼈습니다. 콘서트 티켓팅에 성공했을 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눈물 날 정도로 행복하다’라는 표현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요. 저는 지금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생생히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살고 있어요.
정지혜, <좋아하는 마음이 우리를 구할 거야>
나는 드라마가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고, 언어를 습득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는 절대 배우지 못했을 생생한 표현들을 배울 수 있으니까.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 덕질까지 함께 한다면 효과는 500% 정도 높아질 것이라 장담한다. S 언니의 중국어가 ‘상전벽해’급으로 달라졌던 것처럼(물론 가끔 '현망진창: 어떤 것에 과몰입해 현실은 엉망진창'의 상태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러니 100번이고 봐도 질리지 않을 드라마와 누군가를 찾았다면 당신의 언어는 이미 반쯤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으로 귀국한 S 언니는 아직도 직구를 통해 배우 L이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제품들을 구매하고 있다. 어느 날 언니가 ‘원서 낭독 스터디’를 함께 하자고 했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4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스터디였다. 채팅방에 입장해서 인사를 나누니 처음 만난 사람들 같지 않게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더 대화를 이어가 보니 근래 만난 이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고, 쾌활해서 기분마저 좋아졌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정해서 읽자고 했는데 다들 선택한 책이 같았다. 갑자기 묘한 예감이 들어서 물었다.
-그런데 다들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하하, 저희는 사실 배우 L의 팬클럽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이에요. 이 책은 L이 추천해 준 책이고요.
아, 그럼 그렇지. 이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에너지는 ‘덕질러’의 지문이다. 수다를 떨어보니 일도 하고, 아이도 키우면서, 덕질도 하고, 카페 사람들과 원서 낭독과 필사 스터디까지 하시는 분들이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나도 나름 열심히 산다고 살고 있는데, 한참 부족하구나’를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 역시 덕질의 세계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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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