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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Apr 15. 2022

八. 최고의 교재, 드라마 스크립트

제한된 콘텐츠로 100LS 도전

내가 중국어를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 문화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문화를 모르는 체 중국어만 완벽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중국인들의 생생한 생활이 담긴 드라마를 본다. 사실 언어 실력 향상만 놓고 본다면 몇십 개의 꼭지로 이루어진 드라마를 보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쭉 흘러가 버리기 때문. 하지만 그렇다고 재미있는 드라마 보기를 게을리할 수는 없지! 그간 드라마 스크립트와 함께 해 온 나만의 루틴 살짝 공개~!


베이징에 오자 마자 제일 처음 본 드라마는 환락송(欢乐颂)이었다. 상하이에 사는 5명의 멋진 여성들의 일과 꿈, 사랑을 다룬 내용이었는데 처음에는 (당연히) 하나도 안 들렸다. 한글 자막도 없었으니 제대로 된 이해도 없었다. 그래도 화면으로 유추하고,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재미있게 봤다. 왜 싸우는지, 왜 헤어지는지 너무 궁금할 때면 자막을 미친 듯이 번역하기도 했다. 연이어 북경여자도감(北京女子图鉴), 아적전반생(我的前半生) 등을 이런 흘려 보기 방법으로 봤다. 


기본적으로는 이어서 보되, 새로운 표현들을 습득하기 위해서 각 회 별로 배워보고 싶거나 인상적인 표현이 있는 부분은 대사를 따라 적으며 따라 했다. 처음 가장 큰 문제는 귀가 안 뚫리는 것이었는데 ‘드라마 흘려 보기’ 몇 개월이 지나자 간단한 내용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중국 생활과 중국 문화에 대해 드라마를 통해 처음으로 이해했다. 


중국드라마가 넘쳐나는 샤오미 셋탑




안정적이던 중국어 3년 차에 코로나로 강제 귀국 (당)했다. 모든 수업 또한 중단됐다. 기약 없는 베이징 복귀에 답답하던 이때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드라마 보기였다. 그런데 그냥 보기에는 마음이 불안했다. 새로운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던 장동완 님의 <9등급 꼴찌, 1년 만에 통역사가 된 비법>의 100LS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다. 9등급으로 예고를 중퇴한 (한때 꼴찌였던) 저자가 영화 <노팅힐>로 100LS(듣기 말하기) 훈련을 한 뒤 귀와 입이 트여 1년 만에 통역사가 된 비법을 담았다. ‘6개월 만에 알리바바 입사하기’처럼 자극적인 제목에다 ‘무조건 영상을 보고 따라 하라’는 류의 외국어 관련 책들을 많이 보아온 터라, 처음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전 세계적 재난 앞에서 나도 절실해졌다. 저자가 영어뿐 아니라 불어, 중국어, 일본어, 태국어, 베트남어, 아랍어도 같은 방식으로 성공했으니 비법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 속는 셈 치고 해 보기로 했다. 


'100LS'의 방법은 간단하다. 영화나 드라마 등 본인이 직접 선정한 콘텐츠(100번 봐야 하니 매우 좋아하는 콘텐츠를 선택해야 한다)를 자막 없이 퀵하게 한 번 보고, 스크립트를 구해(혹은 직접 써서) 내용을 완벽히 파악한다. 꼼꼼하게 살펴보는 수준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를 씹어먹을 듯이 분석해서 내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100번을 보는데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극 중 인물로 빙의해서 ‘연기하며’ 보는 것이다. 셰도잉 수준이 아니라 연기자의 속도, 발음, 억양, 호흡 그대로를 똑같이 하려고 노력하는 거다. 이 과정에서 녹음도 곁들이면 금상첨화. 방법 자체는 간단하지만 과정 자체는 절대 간단하지 않다. 40분 분량의 드라마 한 회를 100번 봐야 하니까. (영화를 선택한다면 더 길어진다)


100LS 훈련법은 단 100일이면 됩니다. 100일이 너무 길다고 생각한다면 그동안 당신이 영어 공부에 얼마나 투자했는지 생각해보세요. 딱 100일입니다. 죽을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당신의 인생을 스스로 이노베이션 하는 겁니다.


영화는 너무 길어서 자신이 없었다. 당시 빠져서 보던 중드 <누나의 첫사랑> 3회로 정했다. 넷플릭스 서브 프로그램을 이용해 스크립트를 다운로드하고 모르는 단어와 표현들을 익혔다. 이 과정만 해도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이제 망망대해로 떠날 시간! 무려 같은 콘텐츠 100번 보기! 플레이, 플레이 또 플레이. 걸으면서도, 누워서도, 양치질하면서도 그냥 계속 듣고 중얼거렸다. 아이와 하루 종일 붙어 있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없어서 하루에 2-3번 밖에 보지 못했다. 화장대 위 포스트잇에 그려지던 바를 정자도 끝날 생각이 없었다. 30번이 넘어 가자 너무너무 너어어어무 지겨웠다. 아, 아무 도움도 안 될 것 같은데, 이걸 계속하는 게 맞나? 하는 의심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래도 꾸역꾸역 해봤다. 그러는 와중에 중국 문이 열려서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웬걸, 한국에서 9개월이나 묶여 있었으니 중국어 회화의 퇴보는 당연한 수순이었거늘 결과는 정 반대였다. 예전에 어버버버 하던 회화의 기본 문장들이 갑자기 유려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속도도 빨라졌고, 자연스러워졌다. 많이 쓰는 실생활 문장들 몇 백 개를 몇 백번씩 입으로 내뱉어 본 효과였다. 유레카!!! 저자는 한 편의 100LS가 끝났으면 이제 다른 콘텐츠로 넘어가서 똑같은 방법으로 100LS를 진행하라고 권한다. 그렇게 10개 정도 끝내면 거의 원어민 수준의 스피킹 기술을 보유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수많은 언어 관련 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언어 습득에 가장 좋은 방법은 ‘콘텐츠를 제한하고 반복해서 접하기’고 100LS는 그 정점에 있는 습득법이다. 매력적인 콘텐츠가 쓰나미처럼 쏟아지는 2022년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한 계단을 점프하기 위해서 한 번쯤은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  




이후 베이징을 매일 걷는 도시 산책자로 변모하면서 중국어 공부 시간이 확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드라마를 본다. 목표는 매일 한 회씩, 새로운 표현 다섯 개 건지기.


1. 빠르게 한 번 보기: 주로 집안일을 할 때나 걸을 때, 화장할 때 등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한 회를 빠르게 보며 대략적인 줄거리를 파악한다. 그중 흥미가 가는 파트를 찾는다.

2. 흥미가 가는 혹은 내가 잘 모르는 표현 나오는 부분을 캐치했다면 대본에서 그 파트를 찾아서 꼼꼼하게 새로운 표현과 단어를 확인한다 (*넷플릭스 영상 대본 구하는 방법은 유튜브에 있다.)

3. 새로운 표현은 따로 노트에 적으면서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어보며 익힌다.

4. 생소한 단어나 표현이라면 사전에서 찾아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바이두에서 이미지를 검색한다. 처음 보는 표현은 마음에 확 와닿지 않아 금방 까먹기 마련인데 바이두로 검색해서 이미지로 찾아보면 기억이 오래간다. 

5. 최대한 배우와 비슷한 톤으로 녹음하고 들어 본다. 매끄럽게 녹음을 하기 위해선 여러 번 읽어봐야 하고, 또 내가 발음한 걸 들어보면 어색한 부분을 바로 캐치할 수 있으므로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누가 뭐래도 드라마는 가장 훌륭한 어학 교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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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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