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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Apr 15. 2022

七. 낭독의 마법 (중국 동화 읽기)

신기한 니앤(念)의 세계

활자 중독자로서 새로 배운 언어로 무언가를 간절히 읽고 싶었다. 소설책을 살펴보니 한 장 읽는데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더 쉬운 콘텐츠가 필요해. 멀리 갈 것도 없다. 내 아이의 동화책. 심이가 제일 좋아했던 전집인 로저 하그리브스의 <EQ의 천재들> 중문판을 읽기로 했다. 행복씨, 참견씨, 엉망씨, 꽈당씨 등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는 책으로 읽다 보면 캐릭터별 묘사와 사건이 생생해서 낄낄거리고 웃게 된다. 우리 집에 놀러 온 남자 친구들도 다들 좋아했던 책이다. 


명색이 장학금도 받았는데 아이 동화야 식은 죽 먹기로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경기도 오산.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처음 보는 동사와 표현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의성어, 의태어는 또 어떤가. 하긴 ‘토론’과 ‘단련’ 같은 단어들로 점철된 학교 교재와 아이들이 보는 동화는 마치 다른 세계의 언어 같다.  


간지럼씨는 이름에 걸맞게 팔을 죽 뻗어(伸出shēnchū) 간지럼을 태울(挠náo) 사람을 찾았고, 참견씨는 휘파람을 부는(吹口哨chuī//kǒushào) 누군가를 만났고, 빼빼씨는 입술을 핥았다(舔tiǎn). 이들은 숨을 가쁘게(喘吁吁) 쉬고, 발소리를 죽여 걷는데(蹑手蹑脚), 그 와중에 전화벨은 딩링링, 딩링링(丁零零) 울리고 있다. 몇 장 읽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핑핑. 얇은 동화책이니 하루에 몇 권씩 읽어야지~하던 바람은 그새 날아갔다. 아이 책이라고 쉽게 생각할 게 아니었다. 팔딱 거리며 살아 있는 표현들이 이렇게 많다니!!! 


그즈음 책을 소리 내어 읽는 ‘낭독’을 시작했다. 그냥 단순한 낭독이 아니라 내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 보는 낭독. 원래는 아이 학교 ‘Book Week’ 주간에 책 읽어주는 자원봉사 때문이었는데 ‘낭녹’ 과정을 반복하며 매력에 빠졌다. 고성애 번역가의 말을 빌려보자. ‘외국어를 입 밖으로 자신 있게 내뱉기를 원한다면 소리 내서 읽어야 한다. 눈으로 이해하며 읽는 것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외국어는 결국 입 밖으로 꺼내야 하는 기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입으로 정확히 발음하기가 어려워서는 안 된다. 눈으로 이해하지만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건 모르는 것과 매 한 가지라고 봐야 한다.’ 말하기 숙제를 할 때만 큰 소리로 읽었던 그간의 공부법이 부끄러워지면서 소리 내어 읽는 ‘念(niàn)’의 세계로 발 디뎠다. 

초급 단계에서 꽤 도움이 되는 교재, 아이들 동화




중국어를 애정 하는 사람들 다섯 명이 모여서 원서 낭독 스터디를 하고 있다. 매일 원하는 분량을 읽고 녹음해서 단체 방에 올리면 끝. 낭독 양은 하루에 한 바닥 언저리. 귀찮을 땐 몇 문장만 읽기도 한다. 많이 하는 것보다 매일 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분량에 큰 욕심내지 않는다. 짧은 분량인데도 읽을라 치면 간단한 단어의 성조들도 헷갈리기 마련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꽤 많이 걸린다. 그저 낭독하고 녹음하는 걸로 큰 도움이 될까 우려될 수도 있겠지만, 된다. 무조건 된다! 


‘낭독’과 ‘혁명’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로 낭독의 가치에 대해 설명한 고영성 작가의 <우리 아이 낭독 혁명>. 이 책에 세계적인 뇌과학자이자 도후쿠대학 교수인 가와시마 류타 교수의 낭독과 두뇌 실험이 언급되었다. 류타 교수는 아이들이 게임을 할 때, 묵독을 할 때, 그리고 낭독을 할 때, 뇌의 활성화 정도를 촬영했는데 낭독을 할 때 뇌의 활성화 정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우리 뇌에서 사령탑 역할을 하는 전두전야뿐만 아니라 좌뇌, 우뇌까지 활성화된 결과였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낭독 후 주어진 어휘를 2분 동안 외우게 한 실험에서도 아이들의 기억력이 20%나 향상되었다.


다양한 감각을 활용해 '어렵고, 귀찮게' 언어를 다루면 기억에 훨씬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은 진리다. 눈으로 대충 길게 읽는 것과 소리 내어 짧지만 확실히 읽는 것 중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를 고르고 싶다. 낯선 텍스트니 처음에는 버벅대고 발음 실수가 이어진다. 몇 번이고 다시 녹음해서 들어본다. 이런 과정을 거친 단어와 문장들은 대부분 장기기억으로 간다. 


게다가 낭독은 나의 무지를 자연스럽게 깨우쳐준다. 대강 읽는 것은 괜찮지만 대강 낭독하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유명 독서 연구가인 아이린 파운타스는 말했다. '큰소리로 읽기를 통해 특정한 아이가 사용하는 전략과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전형적인 실수를 교사나 듣는 사람이 파악할 수 있다. 큰 소리로 책을 읽으면 어휘에 대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분명 눈으로 대강 읽을 때는 다 아는 (것 같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낭독을 하다 보면 ‘여기 이런 단어가 있었다고?’ 싶은 심정이 된다. 아주 간단한 단어의 발음과 성조는 또 어떤가. 5년째 보는 단어임이 분명한데도 2성이었는지, 3성이었는지 가물 해진다. 그러니 큰 소리로 읽다보면 금세 '드러나는' 부분이 많아진다. 드러나면 멈춰서 찾아보고 다듬어야 한다. 굳이 누가 고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 이치다. 부끄럽지만 나는 요즘도 가끔 중국어 기초 회화 1권 10과에 나올법한 단어의 성조를 찾아본다. 


다른 멤버들의 녹음을 듣는 것도 꽤 큰 수확이다. 남의 녹음을 그저 듣는 것만으로 나도 나아진다. 참, 신기한 일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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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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