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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Apr 14. 2022

五. 쪼갠 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중단어

어려운 중국어 단어 외우기

중국어를 처음 배울 때는 같은 병음에, 같은 성조는 한 세트밖에 없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철저한 나만의 착각. 같은 병음과 성조를 가진 다양한 단어들이 넘쳤다. 충격을 받아서 속으로 ‘중국인들은 다 천재인가?’하는 생각도 했다. 늦은 나이에 성조부터 차근차근 밟아가며 가끔 머리를 쥐어뜯고 있으려니 흰머리가 폭발했다. (당시 나는 모든 단어들을 4성으로 발음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즈음 남편 춘은 회사 승진에 필요한 점수를 따기 위해 HSK 시험공부에 돌입했다. 중국어에 불타오르던 우리는 매일 저녁 마주 보고 앉아 단어를 외우고, 단어 시험을 봤다. 입사 동기라는 특수한 관계 때문인지 가끔 엄청난 경쟁심을 불태우곤 하는데 그 시절도 그랬다. (난 심지어 남편의 월급이 오르는 걸 탐탁지 않아했다) 


우리는 책 <HSK 4급 한 달 만에 끝내기>에 ‘Day 12’로 나누어져 있던 단어 리스트를 매일 한 장씩 외우고 쪽지 시험을 보기로 했다. 40분 동안 미친 듯이 외우고, 그중 20개 정도 뽑아서 서로에게 문제로 냈다. 무작정 외우는 것보다 시험이 장기 기억에 효과적이니 승부욕 넘치는 우리 커플에게 딱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못 맞추겠다 싶은 단어들도 있었는데 이를테면 锻炼(단련)처럼 그림 같은 단어들. 답을 매길 때면 점 하나, 갈고리 방향이 틀려도 잔인하게 빨간 펜으로 직직 그었다. 그래서 둘 다 점수가 항상 50점 아래였다. 그렇게 조금씩 서로에게 빈정이 상해 갈 무렵… 남편이 두 번째 HSK 시험을 봤는데 놀랍게도 


점수가 하락했다. 


우리는 정말이지 놀랐다. 그래도 서로 눈에 불을 켜고, 그렇게 열심히 단어를 외웠는데 어떻게 점수가 더 떨어지지? 이럴 수가 있나? 


그럴 수가 있었다. 들입다 외우고 빛의 속도로 까먹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단어들은 Ayi(阿姨), a(啊), ai(矮), ai(爱)처럼 발음 순으로 아무 연관성도 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맥락 없는 단어의 배열과 암기니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문장과 맥락을 통한 단어의 습득이 얼마나 중요한지, 쌩으로 단어만 외우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날로 우리는 쓸모없는 격정의 단어 시험을 때려치웠다. 


격정의 단어 시험




외국어를 배우는데 중요한 것이 참으로 많지만 역시 제일 기본은 단어 외우기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잘 들려도, 아무리 유창해도 아는 단어가 별로 없으면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베이징에 처음 왔을 때 한자맹이었던 터라 나에게 중국어 단어 외우기는 그야말로 '이, 얼, 싼' 숫자부터 외워야 하는 '맨땅에 헤딩'이었다. 암기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한자는 너무 어려워서 거의 그리는 수준으로 쓰고, 발음해 보고, 각 단어의 성조와 뜻을 외웠다. 그리고 나만의 (네이버) 단어장으로 보낸 후 가끔 들여다보며 열심히 장기 기억으로 보내려고 노력해 보지만 시간이 지나면 90%의 확률로 희미해진다. 


새롭게 도입한 방법은 예문을 통째 외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학교 교재, 드라마 대본에 있는 모르는 단어를 문장과 함께 외웠다. 이렇게 외우니 기억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여전히 단어 습득량은 턱없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연관 단어 맵을 만드는 방법을 병행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중요한 단어가 나오면 하나의 단어를 두 개의 한자로 나눈 후 각 글자의 뜻과 부수를 파악한다. 많이 쓰이는 한자는 파생되는 단어가 많이 마련인데 파생 단어를 찾아가며 함께 외운다. 쭉 그려 나가다 보면 ‘마인드 맵’과 비슷한 형태가 된다. 앞서 완벽한 공부법에서 찾은 <조직화> 방법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는데 비슷한 범주의 단어들을 같이 외우니 단어장의 단어를 무작정 외우는 것보다 기억이 오래갔다.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实在(shizai, 성실하다)’라는 단어를 공부했다. 딱 봐도 ‘충만하다’, ‘참된’이라는 뜻을 가진 ‘实(shi)’는 엄청난 파생 단어들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온다. 사전에서 연계 단어를 찾아본다. 


其实(사실은), 确实(확실히), 实话(실화), 实用(사용하다), 实现(실현하다),实验(실험하다), 实习(실습하다), 实践(실천하다),现实(현실),实际(실제의), 诚实(성실하다), 老实(솔직하다),充实(충실하다), 真实(진실한), 扎实(충실하다), 忠实(충실하다),踏实(편안하다), 果实(수확), 结实(튼튼하다)


순식간에 实(shi)와 관련된 19개의 단어를 적을 수 있다.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들이니 외우기가 더 쉽다. 이렇게 实(shi)의 단어 맵이 만들어진다. 이중 비슷한 의미로 쓰인 단어들을 분류한다. 그리고 모바일 사전에서 편하게 확인할 수 있는 HSK 활용 단어들을 따로 꼽아본다. (위 19개의 단어들 중 볼드체로 처리한 단어가 모두 HSK 활용 단어들이다) 기억력을 높이기 위해 예문을 함께 외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단어들(주로 HSK5,6급 단어) 중 처음 보는 낯선 한자가 있다면 그 한자를 또 이런 식으로 파고 들어가 본다. 그 한자에 많은 파생 단어들이 만들어진다. 예전에 유행했던 ‘꼬리에 꼬리는 무는 영단어’와 비슷한 느낌이다. 


학원에서 만난 로빈 쌤의 강의 방식도 비슷했다. 로빈 쌤은 새로운 단어가 나오면 무조건 단어를 각각의 ‘한자’로 분리시켰다. 한 글자 한 글자 개별로 이해한 뒤, 결합되었을 때의 뜻을 유추해보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공부하니 지문에 새로운 단어가 나와도 이미 아는 한자가 섞여 있거나, 부수의 의미를 알고 있으면 단어 뜻을 유추하기가 쉬웠다. 새로운 단어가 나오면 매번 쩔쩔매던 나로서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이런 식으로 단어를 공부하니 독해가 쉽고 빨라졌다. 단어 암기력이 높아진 것도 물론이다.  


나만의 단어맵




그 무렵 왕징 작은 도서관에서 ‘중국어 6개월에 끝내고 알리바바 입사하기’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도발적인 제목으로 시선을 끄는 이 책은 한자를 거의 모르던 김민지 작가가 6개월 만에 HSK 6급을 따서 알리바바 인턴으로 입사하게 된 이야기다. 6개월 만에 대단한데! 싶다 가도 이런 유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읽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훑어보니 웬걸! 저자가 소개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어 법’이 평소 나의 방법과 거의 비슷했다. 


저자의 꼬꼬무 단어법은 ‘쪼개기’와 ‘합치기’를 반복하며 단어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오늘 공부해야 하는 단어를 그저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웹사전으로 일일이 검색해보고, ‘각각의 ‘한자’가 어떤 뜻을 가졌고, 그 두 한자가 합쳐져 어떤 ‘단어’의 뜻을 갖게 되는지 찾아서 암기한다. 단어를 그냥 외우는 것보다 확실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단어장 한 장을 넘기는데 2시간이 넘을 정도로 수고스러웠지만 결국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되어 나중에는 시간을 버는 방법이었다고 설명한다. 게다가 뜻을 중심으로 단어를 기억하기 때문에 나중에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유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했다. 평소 내 단어 습득 방법과 비슷해서 물개 박수를 치면서 읽었다. 


5급 단어 ‘财务’를 암기할 때 ‘财’의 뜻이 재물, 금융이라는 것을 공부했고, 5급 단어 ‘评价’를 암기할 때 ‘评’의 뜻이 ‘평가하다’라는 것을 공부했기 때문에 둘을 붙여 놓은 ‘财评’은 ‘금융적 평가’ 뭐 이런 뜻일 거라고 추측할 수 있었어요. 물론 단어를 보자마자 그 뜻이 곧장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 단어의 뜻을 유추하고 앞뒤 문맥을 파악해 기사를 술술 읽어 내려가 수 있었어요.


<중국어 6개월에 끝내고 알리바바 입사하기> 중 




새로운 단어들로 나만의 문장을 만드는 것은 학교의 단골 숙제였다. 이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사전에서 최소한 관련 예문을 5-6개는 찾아보고 어떤 상황에서 이 단어가 쓰이는지, 자주 함께 쓰이는 다른 단어가 있는지 연구해본다. 


새로운 문장을 열 개 정도 만들면 대부분 한 시간이 훌쩍 지난다. 그렇게 어렵게 고민하며 만든 문장에도 선생님의 빨간 펜은 늘 그어져 있다. 하지만 열심히 검색해보고, 직접 문장으로 만들어보고, 정성스럽게 써보고, 선생님이 틀렸다고 지적해 준 단어나 문장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귀찮고 피곤한 어느 오후에는 사전에서 알려주는 예문을 그대로 베껴 냈다. 다음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숙제 중 잘 쓴 문장들을 모두에게 공유하는데 멋진 문장이 있었다. 감탄하는 나를 보고 선생님이 의아해하며 한 말씀. “睿, 네가 쓴 문장이잖아”. 天哪. 지난주에 내가 (베껴) 낸 문장이었다고? 사람의 기억이란 이렇다. 역시 어렵게 외우고 어렵게 공부해야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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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갑자기 내게는 ‘외계’와도 같은 베이징이라는 도시에 떨어진 이후 언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으로 살다 보니 나는 가끔 아주 건방지거나, 아주 공손한, 그리고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생 이불 킥할 만한 에피소드를 모으는 이방인, 어쨌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들여다보고 적응해 온 일상의 기록들. 


서점과 맥주, 후통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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