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군가의 언성히어로가 되기를
회사 생활과 관련된 8편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책 <재능의 불시착>.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다가 너무 공감되고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내 예전 회사 생활도 생각나고, 춘도 생각나고, 읽다 보니 마음이 슬프고, 찌릿하고 뭉클하고, 울분과 감동으로 한 대 맞은 기분... 그랬더랬다.
코팅된 사직서를 남기고 갑자기 사라진 막내 사원부터 야심 차게 남자 1호로 육아 휴직을 썼다가 인생의 쓴맛까지 알아버린 젊은 아빠 하대리, 주변에 한 명쯤은 있을 법한 전설의 앤드류 선배, 반려견 코코를 돌보기 위해 가족 돌봄 휴가를 신청하는 선우… 그리고 작지만 소중한 삶의 이유들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언성 히어로(보이지 않는 영웅)까지… 정말 화가 나는 에피소드 2편(가슴이 뛰는 일을 찾습니다/호의가 계속되면 둘리가 된다)을 비롯하여 한 편도 버릴 편이 없다.
나의 재능은 불시착인가 아닌가. 우리는 지금이 아니라 31세기에 어울리는 인재인가 아닌가. 나는 어떤 빌런인가. 책을 덮으며 낄낄대는데 왠지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언성 히어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람 하게 되던 책.
내일까지 두려움에 떨 사람들이 많아 보이네요 그러게 회사 다닐 때나 상사고 선배지, 그만두면 아무 관계도 아닐 사람들끼리 진즉 기본 매너는 지키고 살면 좀 좋아요? 지금 여기에 다니고 있으니까 껌뻑 죽는 척해주는 거지, 나가면 알게 뭐예요 말도 제대로 안 섞어줄 동네 아저씨고 모르는 아줌마지.
가슴 뛰는 일을 하세요,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요. 놀고 있네. 나는 SNS에 올라온 문구를 보자마자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저 글을 쓴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여전히 그렇게 가슴이 뛰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을까. 글쎄, 그렇다면 심혈관 질환으로 진작 세상을 떠났거나 골골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이윤보다는 선한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하려고 이곳에 왔는데,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보다 훨씬 더 큰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모순에 나는 가끔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나는 아주 일부분을 좋아하는 것뿐이면서 안 맞는 일로 가득 찬 일을 직업으로 골랐다. 그게 가장 큰 실수였다. 나에게 이 직업은 지하철에서 파는 델리만쥬 같았던 거다. 냄새를 맡으면 참을 수 없이 끌리지만 실제로 먹게 되면 예상과 다른. 간식일 때 만족스러운 음식을 삼시 세끼 먹게 되자 삶이 엉망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놈의 가슴 뛰는 삶 타령 그만하라고. 너의 시간과 재능, 그리고 인내를 들이붓는 중요한 문제를 고작 심혈관 반응에 맡기면 되겠니? 그리고 직장에다가 끊임없이 가슴 뛰는 자극과 설렘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좀 웃기지 않아?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그거 되게 질척대는 거다, 너.
Mediocre ‘보통 밖에 안되는’. 준은 토익 공부하던 시절 이 단어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매캐한 불쾌감을 잊지 못한다. 그때의 준은 보통 사람에게 덧붙이는 설명이 고작 ‘썩 뛰어나지는 않은’이라는 사실에 꽤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준은 바로 그 ‘평범한 보통의 삶’을 살기 위해 아등바등 기를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압박 면접이라는 건 진짜 황당한 짓이에요. 원래의 압박 면접은 이력서에 적힌 내용 중에 허위가 없나, 해당 포지션에 능력이 있나를 꼼꼼하게 검증해서 찾아내라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와서 이상하게 변질됐잖아요. 상대방에게 모욕을 줘서 당황하게 만든 후 얼마나 침착하게 반응하는지를 평가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진짜 웃긴 일이죠.
그러게요. 모욕을 당해도 침착해야 하는 능력은 도대체 회사 어디에 필요한 걸까요?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의 기준을 성인 평균 수명의 3분의 1로 잡았다고 했으니, 백 세 시대에서는 어린이가 서른세 살까지인 셈이다. 무엇을 새로 발견해도, 새로 시작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였다. 준은 아직 불시착한 게 아니었다.
오피스 빌런은 7대 유형이 있다. 뭐든지 세 번 지시해야 업무를 해오는 제갈공명 빌런, 남은 일을 다른 사람이 하도록 떠넘기고 사라지는 신데렐라 빌런, 늘 자릴 비우는 다크템플러 빌런, 일이 터지면 남을 내보내고 보상은 자신이 챙기는 포켓몬 트레이너 빌런, 엑셀 프로그램 등 본인이 모르는 건 일단 배척하는 흥선대원군 빌런, 능력에 비해 욕심이 큰 아따아따 빌런,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만드는 파워레인저 빌런이 그것이다. (주간 동아 기사 참고)
처음으로 준우를 안고 화장실에서 똥을 눌 때는 아득한 심정이었다. 뭐랄까, 인간의 존엄성이 손상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몇 번 반복되니 그것도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육아에서 가장 힘든 건 업무의 시작과 끝이 제멋대로라는 사실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근무환경에 피로가 몸 전체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게다가 10킬로그램에 가까운 아이를 매일 안고 있다 보면 어깨와 팔이 빠질 것 같았다.
오늘은 나 홀로 육아 72일째, 새롭게 깨닫게 된 건 육아가 사랑과 인내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체력적이라는 사실이었다. .. 어쩌면 산후 우울증이라는 것도 빌어먹을 호르몬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애를 낳고 몸이 만신창이가 됐는데 주 7일 18시간씩 일하면서 잠도, 식사도, 샤워도 제대로 못하면 누구나 베란다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지지 않을까. 인수인계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아이는 죽을 듯이 울고 있으면 말이다.
물론 힘든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나만 볼 수 있는 근사한 순간들도 있었다. 준우가 기껏 만든 유기농 이유식을 식판과 머리에 골고루 바르고 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게 되었지만, 내 품에 착 감겨서 뽀뽀를 해주며 까르륵 웃을 때나 아기 냄새를 풍기며 쌕쌕 자는 모습을 볼 때는 마음이 벅차올랐다. 10시간은 원수같이 꼴 보기 싫은데 2시간이 미치게 사랑스러워서 참아진다는 맘 카페의 글은 진짜였다. 행복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질감과 촉감으로 만져진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보다 준우어를 잘 해독했을 때 그 우쭐한 기분이란.
선우는 품 속의 그 적당한 무게와 따뜻한 온도에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으면서도, 자신이 위로하면 반드시 기분이 풀릴 거라고 자신하는 코코의 태도가 어이없어 웃기도 했다.
결초보은: 이 은혜 잊지 않고 다음 초보에게 갚겠습니다.
‘달리는 배추 잎사귀’라는 닉네임의 고객님은 모르시겠죠. 별생각 없이 쓴 짧은 글이 이렇게 애 둘 낳은 아줌마를 아이처럼 울게 했다는 걸요. 하루아침에 남편이 장애인이 되는 바람에 일 년 동안 재활 뒷바라지를 하는 동안에도, 첫 장사를 덜덜 떨면서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리고 맵디 매운 악플을 보면서도 단 한 번 울지 않았던 독한 여자인데.
재능의 불시착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