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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Oct 19. 2022

환상적인 중슈거에서 상상해 본 미래의 서점

우리가 계속 가야할 길

가끔 책을 읽는 것보다 서점을 거닐며 책의 제목을 따라가는 게 더 재미있을 때가 있다. 이 분야에 이런 신간이 나왔군, 이건 진짜 스테디셀러다, 이 작가가 이런 분야의 책도 썼다니 의외네, 하면서 한참을 책 표지와 제목만 구경한다. 제목만 보고 책 내용 맞추기, 같은 작가가 쓴 다른 책 찾아보기, 좋아하는 키워드 검색하기 등 책으로 가능한 놀이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책으로 둘러 싸인 공간을 더 사랑하고, 책 냄새를 킁킁거리는 그 순간을 제일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국문학과가 아니라 문헌정보학과에 갔어야 했는지도.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니 대부분 유년 시절을 책임져 준 추억의 공간이 있었다. 학교 앞 문구점, 동네 서점, 헌 책방 같은 장소들. 나는 기껏해야 삭막한 서적 백화점 혹은 개포도서관이었달까. 어린 내게 조금 더 환상적인 공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를테면 세상에 갑자기 책이라는 비가 내린 것 같은 <중슈거(钟书阁)> 같은 서점 말이다. 책도 중요하지만, 책으로 이끌어주는 건 책이 있는 공간이니까.


중국 출판업체 진하오가 설립한 서점인 중슈거는 2013년 상하이점을 시작으로 중국 전역에 체인점을 열었다. 중슈거의 특이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생경하고 아름다운 공간이다. 사방이 온통 거울과 책으로 뒤덮여 있던 중슈거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손바닥으로 조각난 거울을 더듬거리며 길을 찾아야 했던 롯데월드 미로 찾기를 떠올렸다. 신비한 책의 세계에 진입한 나는 어릴 때 느꼈던 흥분감으로 잠시 넋을 놓아야 했다.


'오로지 책에 몰두할 수 있는 현대적 공간'이라는 모토를 가진 중슈거는 상하이 템즈타운점을 시작으로, 항저우, 충칭, 베이징, 청두 등 다양한 도시에 아름다운 공간을 마련했다. 중국의 고전 정원을 형상화한 베이징점, 자연을 그대로 담은 청두점, 책벌레를 형상화한 나선형 책장을 선보이는 선전점, 정신 없이 바쁜 일상을 의미하는 횡단보도를 가져온 상하이점, 숲을 재현한 항저우점 등 지역의 위치와 특성, 역사 배경까지 고려했다. 진하오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고 한다. 아름다운 공간이어야 한다. 그 결과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여러 차례 꼽히기도 했다.


서점이 관광코스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뭐 어떤가. 서점에 오면 책을 읽을 확률이 높아지는데. 한 명의 아이에게 놀이공원이 주는 흥분감을 안겨 줄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이라면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닌가.


책의 규모로만 승부하던 서점의 시대는 지났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서점,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서점, 우리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중슈거를 어슬렁거리며 나는 미래의 서점에 대해 상상해 본다. 20년 뒤, 30년 뒤 서점은 어떤 모습일까? 안경을 끼고 서점을 돌아다니면 내가 원하는 책들이 공중에 떠오르고, 스캔을 하면 오디오 소설과 드라마가 자동 재생되는 신(新) 기술로 점철된 공간이려나.


서점의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해 준 책이 있다. 제일재경주간 미래예상도 취재팀이 쓰고 출판사 유유에서 출간한 <미래의 서점>. 이 책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각종 서점을 이해하고 미래의 서점을 그려보는데 튼튼한 기반이 되어 주었다.


서점 강국은 역시 일본이다. 160개의 고서점이 빼곡하게 들어선 진보초 고서점 거리, 하나의 개별 문화가 된 츠타야슈뎬이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모리오카슈뎬. 이곳은 일정 기간 동안 오직 하나의 책만 팔면서 서점을 그 책을 위한 공간으로 꾸민다. 책 내용에 따라 일주일 한정으로 케이크 가게나 잡화점, 옷 가게, 다육 식물 정원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독특한 콘셉트로 인해 이미 독자들 사이에서 핫플레이스다.


대만은 단연 청핀슈뎬이다. 청핀슈뎬은 1999년 아시아 최초로 24시간 문을 여는 서점을 선보였다. 청핀슈뎬 CEO는 “비즈니스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지만, 문화 없이 살아남고 싶지 않다”라는 인상적인 철학으로 결국 독자들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는 청핀으로 가면 된다"라는 평가를 받고 광저우의 1200북숍을 비롯해서 중국의 많은 서점의 롤 모델이 되어준 공간을 만들어 냈다. 


중국 서점들은 일본, 대만 서점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다. 대형 쇼핑몰에는 빠짐없이 위치하고 있는 시시푸슈뎬, 지점의 지역적 특색을 충분히 고려하는 페이지원, 전통 서점의 가치를 고수하고 있는 싼롄타오펀슈뎬, 여우신, 마즈런 등 독립서점도 있다.


이 책을 덮으며 서점의 미래에 대해 너무 부정적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미래에도 오프라인 서점이 필요한지에 대한 대답은 아래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온라인 서점의 공세에 밀리고 있지만 오프라인 서점에는 대체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구매’는 온라인으로 대체할 수 있어도 ‘그 자리에 있는’ 체험은 유일무이하다. 오프라인 서점은 사람과 책, 사람과 공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지역 공동체를 세우고 공공 지식 생활의 주춧돌 역할을 한다. 오프라인 서점은 도시 정신이 외적으로 다양하게 표현된 형태이며 도시의 진짜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279p


츠타야슈뎬의 큐레이팅을 책임진 일본 북 큐레이터 하바 요시타카의 말도 힘을 보탠다.


-저는 이상적인 서점이란 독자가 알지 못했던 책을 만나게 해주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자가 책을 뽑아 들게 만들고, 독자를 위해 놀라움을 창조해 내고, 독자가 책과 우연히 만날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익숙한 일상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제공하고, 낙차를 만들어야 하는데 저는 이것을 긍정적 좌절이라고 부릅니다. 200p


어떻게 보면 서점이야말로 우연으로 점철된 공간이다. 우연히 발견해서 들어가고, 우연히 책을 집어 들고, 우연히 기억에 남는 문장을 만나는 것처럼. 새로운 우연과 긍정적 좌절이 기다리고 있는 한 우리는 서점을 찾을 것이다.


이북 서비스 '밀리의 서재'를 이용한 이후로 책을 가지고 노는 재미가 추가됐다. 몇 년 전 베스트셀러 순위 찾아보기, 완독 지수로 정렬해 보기, 다른 이들의 밑줄 찾아보기, 모바일 메신저처럼 책의 핵심을 정리한 챗북 보기, 오디오로 책 듣기 등 몇 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놀이다. 제일 소중한 것은 하이라이트 기능이다. 그간 내 마음에 닿았던 몇 백 개의 문장들이 고스란히 저장돼 언제든지 검색할 수 있다.


모바일로 책을 읽으니 책을 사지 않거나 오프라인 서점에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실상은 정반대다. 이북을 접하며 나의 책 사랑은 두 세배 깊어졌다. 이북으로 읽은 책 중 간직하고 싶은 책은 빠짐없이 구입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책을 찾아 자주 서점에 들른다. 책이라는 콘텐츠로 맺어진 종이책과 이북의 관계는 대척점이 아니라 상호 보완 관계에 놓여 있다.


책을 찾는 시간에 내가 제일 많이 검색하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서점’이다. 검색 창에 서점 혹은 도서관을 입력하고 관련 신간들을 탐색한다. 그곳에서 나는 과거의 서점과 현재의 서점, 미래의 서점을 만난다.


세계의 유명 서점과 출판 환경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최근 한국에서도 다양해지고 있는 독립 서점과 책방 지기를 소개한 <서점의 일>과 <동네책방 생존탐구>, 서점 운영은 이상이 아니라 장사라는 것을 혹독하게 알려 준 다양한 독립 서점 운영기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 <언젠가는 서점>, <이러다 잘 될지도 몰라 니은서점>, 서점을 배경으로 한 소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낮 12시, 책방 문을 엽니다>, <런던의 마지막 서점>, 광저우의 1200북샵 창업자 류얼시의 에세이 <서점의 온도>, 헌책방지기가 서점과 관련된 좋은 문장들을 기록한 <서점의 말들>도 모두 그렇게 만났다. 그냥 책이 좋아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책으로 아직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그 마음들이 좋아서 이내 흐뭇해진다.


고군분투하는 독립 서점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서점의 일>은 데미안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싱클레어, 다수의 길은 쉽다네. 우리의 길은 어려워.

하지만 우린 그 길을 가게 될 거야.


헤르만 헤세, <데미안>


그 어려운 길을 굳이 재미있게 가는 사람들이 있다. 츠타야서점의 마스다도 말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명령이 아니라 꿈에 의해 움직인다고. 꿈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의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영수증에 서점 일기를 적고(대전 다다르다 서점), 저자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signed edition’(당인리 책 발전소 위례점)과 책과 어울리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준비(책방오늘)한다. 옛 주인의 메모가 꽂혀 있는 중고 책이 있는 뉴욕 스트랜드와 아이들에게 놀이공원 이상의 환상을 선사해 줄 수 있는 중슈거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려운 그 길을 계속 '함께' 가게 될 거다.

베이징
상하이
청두
충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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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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