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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Oct 26. 2022

[에필로그] 이방인의 서점 산책: 나만의 서점 별자리

여전히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나를 보듬으며

서른다섯, 타의에 의해 낯선 언어의 도시에서 이방인이 됐다. 덜 외로운 이방인이 되기 위해 유현준 교수의 제안을 떠올렸다. 내가 사는 도시에 언제든 숨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다. 내게 안정감을 주는 공간은 서점이었기에 나만의 서점 리스트를 만들기로 했다.


이방인의 서점 산책은 발터 벤야민의 도시 산책과 유사하게 매우 즉흥적이고, 제멋대로다. 주로 무작정 걷다가 자석에 이끌리듯 들어갔고,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이 거의 없었기에 모든 감각을 활용해서 서점이라는 공간을 받아들였다. 아직도 베이징 서점들을 배회하며 느꼈던 향기와 책 넘기는 소리, 소파의 질감, 후통의 풍경들이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이방인의 서점 산책이라는 특별한 경험은 좋아하는 공간이 쌓이며 나만의 도시 별자리가 됐다. 


언어가 조금 익숙해진 베이징 생활 중반부터 나는 활자 중독자답게 ‘게걸스럽게’ 텍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때로 중국 문학이나 에세이, 서점들의 위챗 모먼트나 작가에 대한 기록이었다. 루쉰의 나라에서 읽는 루쉰의 잡문과 라오서가 마음껏 사랑한 도시 베이핑에서 읽는 그의 소설은 생기를 띠었다. 자신의 조국을 미성숙한 국가라고 비판하는 지식인의 서점에서 배회했고, 언제나 유쾌한 '언니미'를 보여주는 싼마오를 닮은 책방 주인이 있는 서점에서 무언가를 썼다. 루쉰으로 시작해서 라오서, 위화, 바진, 모옌, 베이다오를 거쳐 싼마오, 하오선생, 뤼후이, 켄 리우, 마우이, 쯔진천까지 만나며 나는 한 시절을 통과했다. 직업란에 처음으로 적을 게 없는 이방인의 신분으로 별다른 목표도 없이 불안해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껏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그 시간 동안 꽤 즐거웠다. 오래 잊고 지낸 산책과 읽기 혹은 문학에 대한 열정을 다시 찾아서, 어쩌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작가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무엇보다 서점 산책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여전히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마흔의 나라서 차라리 안도했다.


대부분 혼자였던 서점 산책은 ‘고독만큼 함께 하기 좋은 동반자는 본 적이 없다’던 소로의 문장을 완벽하게 이해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충만했는데 아마 내게 책들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어떤 순간은 찰나에 시그널을 보낸다. 이 순간을 아주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 같은 시그널. 이방인으로 살아간 삶은 그런 때가 많았다. 내게 그런 순간을 많이 선사해준 도시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시간의 유한성이라는 제약도 때로 선물이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곧 사라질 풍경에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생생하게 기억하고자 했으니.


이 일기는 걷고, 읽고, 쓰고, 사유한다는 것이 결국 같다는 것을 알려준 시간의 기록이다. 어떤 기록은 쓰는 이의 만족을 위해 오롯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나만의 서점 별자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든든하다. 그 동안 읽은 무수한 문장들이 바람이 되어 내게 닿는다. 더 이상 정답과 쓸모를 위해서만 살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보듬는다.


아마도 그곳에 큰 빚을 진 셈이다. 모든 게 서툰 이방인이었지만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실존 감각은 구체적이면서도 날 것 그대로였다.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계속 존재하고 싶다.

---

서점과 맥주, 후통(胡同)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가. 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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