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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Nov 23. 2022

한없이 무거운 사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

엄마 옆에 있으면 건강해지고 가방이 무거워진다. 만날 때마다 자꾸 뭘 챙겨와서 주시기 때문이다. 어제도 나는 한티역에서 엄빠와 저녁을 먹고, 묵직한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고구마, 바나나, 요거트, 우엉조림과 미역줄기가 든 에코백이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에코백이 공기의 무언가를 흡수하는지 갈수록 무거워졌다. 근처에서 심이를 기다렸다 버스를 함께 타고 집으로 가야 했기에 우엉조림 뚜껑이 폭탄처럼 터지는 상상을 하며 스타벅스 문을 조심히 열었다.


오늘따라 유독 무거운 항목들만 쏙쏙 골라서 넣으신 것 같아서 내가 최근에 엄마에게 뭘 잘못했나 반성해 보았다. 아니지, 훌륭한 인품으로 내 친구 및 지인에게 '안사임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우리 엄마가 그럴 리가 없지. 그냥 이것은 한없는 사랑인데 너무 무거운 사랑이다. 요즘 운전을 멀리하는 내게는 정말 무거운 사랑이다. 설상가상으로 어제는 심이 피아노 가방과 영어 가방, 내 노트북 가방까지 있었다. 욕심내서 옷을 껴입은 탓에 두꺼운 기모 후드도 벗어서 손에 든 상태였다. 누군가 나를 봤다면 귀여운 피난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심이 수업이 끝나고 기모 후드로 에코백을 둘둘 말아 아기처럼 조심히 안고 버스에 탔다. 버스에서도 우엉조림 뚜껑이 혹시 열리지 않을까 손가락 끝으로 몇 번 확인했다.


왜 이렇게 짐이 많아?라는 심이에게 이것은 짐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사랑을 받으면 좋다가도 짜증이 날 수 있는데 그럴 때 무거운 사랑을 챙겨온 상대방의 수고를 생각하고 감사해야지 섣부르게 짜증을 내면 절대 안 된다고 일러두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 아니 엎질러진 짐이라 설사 짜증을 낸다고 해도 절대 그 짐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려주었다. 엄마도 조만간 네게 이렇게 무거운 사랑을 줄 수 있으니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도 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건 다 네 몸으로 들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다,라는 내게 심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는 고구마랑 바나나 안 먹는데? 메롱-이라고 했다. 코 평수를 늘리며 인상을 구기고 싶었지만 나를 위해 영어 가방을 책임져 주는 아이를 대견하게 바라봤다.


우엉조림이 무사히 나의 블랙 냉장고에 안착한 순간 환희를 느꼈다. 이틀간의 반찬 걱정이 사라져서... 라기보다는 평온한 마음으로 폭탄을 들고 집으로 온 스스로가 대견해서였다. 세상을 살다 보면 사랑이 가끔 이상한 모양으로 도착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다. 한 꺼풀 벗겨보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랑이니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감정이나 태도도 마찬가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태도를 갖출지 수많은 기로에 선다. 짜증이나 분노 쪽에 서고 싶을 때도 많지만 나는 요즘 꽤 효과적이고 모두가 행복한 능구렁이적 선택을 능숙하게 한다. 장면의 단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이 탄생하기까지 그것에 깃든 이야기와 마음을 생각해 본다. 무언가를 속속들이 이해하면 짜증이나 분노가 설자리가 없다. 다 괜찮고 감사해진다. 섣부르게 분노의 편에 서면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더 큰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니 이런 선택은 효율적이기까지 하다.


책을 많이 읽으니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됐다. 이것이 읽고 쓰는 자의 스토리를 상상하는 힘이 아니면 무엇인가? 나는 감히 이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술임을 설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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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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