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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Dec 13. 2022

오래 살아남기

다이아몬드와 장수 이론

오래전 아이를 먼저 낳은 K 선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 거침이 없고 정의로운 여장부 스타일의 그녀를 나는 줄곧 부러워했다.


-아이를 가지는 건 아주 큰 다이아몬드가 생기는 것과 비슷한 일 같아.

-네? 다이아몬드요?

-다이아몬드가 생기기 전에는 무서운 게 없었거든. 잃을 게 없었으니까, 덤벼도 나만 다치면 그만이니까. 다이아몬드가 생기니 전전긍긍하게 돼. 세상에 무서운 것이 이렇게 많았던가? 요즘은 뉴스도 잘 못 보겠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선배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데다 다소 식상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년 뒤 엄마가 되어 잠든 아이의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 대화가 생생하게 되살아 났다. 정말 아이는 귀한 다이아몬드 같았다. 그것의 안위를 염려하며 나는 전에 없이 걱정과 겁이 늘었다. 거대한 이 마음을 둘둘 말아서 숨겨 버리기 위해 용기와 맷집을 길러야만 했다. '엄마는 용감했다'가 아니라 용감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즈음 내 기도 목록에는 '장수(长寿)'가 포함됐다. 예전에는 짧고 굵게 사는 예술가의 삶도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존재를 마주하니 가늘어도 길게 살고 싶어진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는 일의 다른 모습은 나 자신을, 내 건강을 돌보며 적어도 너무 일찍 그 곁을 떠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조심하는 일이었다. 어느 때고 살아남아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 주는 일차원적인 사실이 아이에게는 절대적인 사랑이 될 수 있었다. 아빠가 왜 열심히 산을 타고, 마라톤을 하셨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빠가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군더더기 없는 정확한 문장으로 평론이라는 장르도 예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 신형철 평론가가 최근 <인생의 역사>라는 책으로 돌아왔다. 그의 예전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또 읽으며 그의 글을 기다려왔다. 특히 '시'에 관해 다룬 이번 책은 깊이가 남다를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변화는 그동안 그가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효심이 지극한 그에게 '아빠'라는 새로운 자아정체성이 가져다 줄 변화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부터 평소 나의 '다이아몬드와 장수' 이론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부분을 발견했다. 그가 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인용한 시는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다. 매우 짧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이 시의 '사람'은 시대, 사상 혹은 연인 등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읽든 핵심은 사랑하는 무언가를 위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살해되지 않기 위해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걸어야 한다는 것. 부모ㅡ자식 관계에 적용하면 더욱 명징해진다. 부모가 된다는 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자기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아이에게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귀한 다이아몬드를 가지는 일은 스스로도 다이아몬드가 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부모는 다짐한다. 아이가 우리를 필요로 하는 마지막 날까지 살아남자고. 신형철 평론가는 이 시를 다루며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45년을 살았고 누군가의 아버지로 아홉 달을 살았을 뿐이지만, 그 아홉 달만에 둘의 차이를 깨달았다. 너로 인해 그것을 알게 됐으니, 그것으로 네가 나를 위해 할 일은 끝났다. 사랑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나를 사용하렴. 나에게는 아버지가 없었지. 그래서 내 어머니는 두 사람 몫을 하느라 죽지도 못했어. 너의 할머니처럼, 나는 조심할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각오할 것이다. 빗방울조차도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을게. 죽어도 죽지 않을게. 26p


'나의 엄마는 두 사람 몫을 하느라 죽지도 못했다'는 고백이, '사랑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나를 사용하'라는 허용이, '죽어도 죽지 않을게'라는 다짐이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다이아몬드를 보듯 너를 보고, 그리고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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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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