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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Nov 24. 2022

삼인의 석공(石工)

마음의 성벽을 지어주는 사람들

사람의 마음에도 성벽이라는 게 지어질 수 있을까? 몇 천년쯤 된 단단한 돌로 만들어져 거친 폭풍우에도 끄덕 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성벽 말이다. 그럴 수 있다. 고요한 시간에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세 명의 석공들이 뚝딱뚝딱 벽을 짓고 있으니까.


일 번 석공 친오빠 앤드류. 스무 살 전까지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자 멘토다. ‘니네 집은 꼭 KBS 일일 드라마에 나오는 가족 같다’는 지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남매는 우리처럼 이렇게 사이가 좋은 줄 알았으니까.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다투지 않고 문학, 영화, 음악, 스포츠(우리는 롯데 어린이 야구단이었다. 인생의 쓴맛을 너무 일찍 맛보게 된 건 그 때문이다) 등 모든 콘텐츠의 영감과 감성을 함께 나누며 유년 시절을 통과했다. 가끔 술잔을 기울이며 미래나 사랑에 대한 고민도 함께 했다. 한번도 다투지 않은 것은 우리의 인성이 훌륭해서라기보다는… 비슷한 감성과는 달리 기질이나 욕망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정의와 분노에 불타는 그를 ‘뭐 저런 인간이 있지?’하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면 앤드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앤드류 군대 첫 휴가에 하늘색 풍선 이벤트를 준비하고 경운기 소리가 나는 군 비행기를 타고 장교 임관식에 참석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늦은 취직 탓에 끝없이 내게 현금을 땡기면서도 동생 결혼식 전날 감동의 편지를 써서 기어코 눈이 팅팅 부은 신부를 만든 사람이 앤드류였다. 앤드류가 내게 준 지지는 바쁜 일상에 치였던 서른 살 이후 자주 닿지는 않았지만 강력하고 견고했다. 오빠는 가끔 “넌 꼭 글을 써야 돼”라고 말하며 좋은 책을 선물해 주곤 했는데 바쁘게 일하던 나는 ‘내가 왜 글을 써야 되지?’라는 어리둥절함을 느끼면서도 그 지지가 내 안에 무언가를 계속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 잊고 지낸 일기장을 읽는 것 같은 아련하고도 그립지만 단단한 느낌이었는데 그것은 기저귀 차던 시절부터 현재까지 나라는 인간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만이 전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두 번째 석공은 고등학교 때 만난 나의 친구다. 친구보다는 가족에 가까운 소울메이트. 친해지자마자 그녀가 아일랜드라는 당시 내게는 매우 낯설었던 섬으로 떠났기에 우정과 그리움이 더 깊어졌다. 예쁜 편지지에 그녀에게 닿을 감성 글귀를 써 내려가는 것은 내 주요 일과였다. 이 친구의 지지는 시도 때도 없이, 장소 불문하고, 낯간지럽게 일어난다. 친구의 입에서 묘사되는 나라는 사람은 너무 멋져서 나조차 반할 지경이다. 나는 종종 그 친구 앞에서 ‘나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야’… 라고 울상을 짓고 있지만 그녀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때때로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듯 화려한 확신을 전해준다. 내 목표는 이 친구가 믿고 있는 그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굉장히 용기 있고 따뜻한 사람을 흉내 내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마지막이라는 게 있고, 그 시기를 알 수 있다면 네 아름다운 착각 때문에 내 삶이 얼마나 든든하고, 튼튼했는지 감사함을 전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석공은 나와 한 침대를 쓰고 있는 춘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사랑은 독보적으로 이상해서 나는 자꾸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상처를 줬다. 스물 다섯 나에게 사랑은 장미 향기 같은 것이었는데 그의 사랑에는 섬유유연제나 잔치국수 같은 생활의 냄새가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금기 빠진 바다 물 같고 쨍함이 부족한 봄 같은 그의 사랑은 말이 적고 행동이 많았다. 그 사랑은 성실하고 헌신적이고 생활적인 지지가 되었다. 내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고(이해할 생각도 없을지도), 내 글을 유심히 읽지도 않지만 내게 자유 시간을 주는 것이 지상 최대 목표인 사람처럼 묵묵하고 빠르게 몸을 놀린다. 도둑이 든 게 아닌가 싶은 엉망진창인 거실이 이어지다 어느 날 놀랍게 깨끗해진 공간을 보더라도 아무 의견도 내지 않는다. 깨끗하다는 칭찬조차 미래의 나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는 로봇 같다고 타박하지만 그의 실용적인 배려가 나보다 훨씬 더 깊고 따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뜨겁지 않지만 뜨듯한 온돌 아랫목 같은 마음이다. 나는 춘에게 예쁜 문장들을 보낸다. 문장으로 마음의 빚을 갚는 아주 간편한 방법이다. 다시 태어나도 춘과 결혼하고 싶다는 고백은 어떤 의미에서 그에게 공포스러울지도 모르지만 뻔뻔한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세 사람이 내 마음에 지어 놓은 강력한 성벽 덕분에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비아냥이나 스스로 느끼는 자책이 마음 정 중앙까지 닿지 않는다. 그저 흘러 들어왔다 성벽 모서리를 적시고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 채 어딘가로 빠져나간다. 자존감이라는 것은 이런 지지를 양분 삼아 아름답게 피는 꽃이 아닐까. 나도 그들의 마음에 이렇게 튼튼한 성벽을 짓는 석공이 되고 싶은데 아직 종이 인형처럼 나약하고 나풀거린다.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사실 도무지 모르겠고 자신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그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되었다. 문장과 책을 여전히 사랑하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진심으로 긍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된 것이다. 이것은 한 인간이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빛나고도 귀한 확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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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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