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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Dec 02. 2022

일상의 요지경 재미

점점 우스워지는 사람

심이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 나를 가장 긴장시키는 것은 '이거 재미없는데?'다. 인생이나 배움의 과정에서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재미'이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자지러지게 웃는 열 살 아이가 재미가 없다면 그것은 심각한 신호다. 뭔가 잘못됐으니 방향 혹은 방식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재미만 찾으면 쓰나, 의미를 찾아야지. 에헴. 마음속 유교걸의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재미의 효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재미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오래 지속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하고 싶다면 꾸준히 오래 해야 하고, 그러려면 재미는 필수 조건이다. 재미가 전혀 없는 것을 오래 혹은 평생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수능이 공부의 끝이 아니다. 트렌드에 발맞춰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 교육은 고미숙 선생님의 말씀처럼 공부를 가능한 한 재미없게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 교육은 공부를 가능한 한 재미없게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마치 공부는 괴롭고 지겨운 것이라는 숙명론에 빠진 것처럼. 하지만 그거야말로 거대한 착각이고 망상이다. 공부는 본디 즐겁다." 내가 아는 대가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를 재미있어 했다. 고뇌와 지루함은 동일하지 않다.


일본의 유명 배우 키키 키린도 비슷한 철학을 가지고 살았다. 암으로 오른쪽 가슴 적출 수술을 하고 전신암으로 투병하다 떠난 그녀는 심지어 암에서도 재미를 찾았다고 말했다.


-나는 어떤 일에서든 재미를 찾아요. 심지어 병에서도요. 재미를 찾으려면 치료를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녀는 병에 걸려서 좋은 점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했다. 상을 받아도 시샘 받지 않고 말을 못 해도 아무도 책망하지 않는다. 싸울 힘이 없으니 겸손해지기도 하고, 무언가를 거절할 때도 암 핑계를 대니 쉽다고 했다.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어깨 통증이 있을 때도 "아프다"라고 하지 않고 "아아, 시원하다"라고 했다. 이혼 서류를 내고 온 남편에게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서류를 냈다는 건 하나의 진보'라고 추켜 세운다. 나는 몇 개의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를 봤을 뿐이지만 그녀의 삶의 자세가 담긴 글을 몇 개 읽자마자 롤 모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녀처럼 세상만사를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유쾌하고 웃긴 할머니로 살다가 마지막에 '이제, 그만 물러가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싶다.


재미를 찾는 안목은 결국 유머 감각으로 연결된다. 내 기준으로 독립 서점 주인 중 가장 뛰어난 유머 감각을 가진 이는 숀 비텔(Shaun Bythell)이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중고 서점 주인인 그는 한때 의심의 여지 없이 책을 사랑해서 책방 주인이 되었지만 서점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과 온라인 서점의 공습으로 분노에 휩싸인다. 강력한 라이벌인 아마존의 전자책 단말기 '킨들'을 총으로 쏴서 서점 벽 한쪽에 걸어 둔다. 이 농담 같은 풍경으로 서점은 핫플레이스가 됐다. 그가 <숀비텔의 서점일기>에 이어 최근 집필한 책의 제목은 이렇다. <귀한 서점에 누추하신 분이>. 누추한 한 명의 자아로 그의 서점 기록을 보며 나는 낄낄 웃었다.


심이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재미있는 사람은 엄마"라고 말했을 때 나는 3사 예능 대상을 휩쓴 것처럼 기뻤다. 그것이 내 목표였기 때문이다. 아이를 자주 빵 터트리는 엉뚱하고 웃긴 엄마. 사소한 것에 낄낄거리는 이상한 엄마. 꽉 막힌 논리나 훈계보다 적당한 유머와 재미가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엄마. 물론 아이가 제일 잘하는 일 중 하나가 부모가 유머감각을 발휘하기 전에 이성을 앗아간다는 것이지만 그럴수록 유머 감각을 갈고 닦아야 한다. 이성의 끈을 잡아주는 건 유머 감각이니까. 그렇게 너그럽게 마음을 먹으면 자주 놀라고, 자주 감탄하는 아이 시선을 빌려 자연스럽게 인생의 소소한 재미를 찾는 능력치도 올라간다.


전 유머와 농담과 재미와는 거리가 멀어요,라고 지레 포기하지 말자. 신경가소성의 원칙에 따르면 우리의 똑똑한 뇌는 외부 환경의 양상이나 질에 따라 스스로의 구조와 기능을 변화시킨다. 애써 재미를 찾고, 유머 감각을 발휘해 보고자 노력하면 언젠가는 바뀐다는 이야기다. 물론 썰렁한 아재 개그를 견디지 못하는 지인들에게 돌을 맞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가끔 아이가 내게 돌을 던진다. 아재 개그를 위협하는 줌마 개그.)


요즘 내게 가장 큰 재미를 주는 것은 역시 읽기와 쓰기다. 태어나서 이렇게 빠져든 게 있었나 싶다. 이것 또한 중독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중독이니 다행이다. 쓰고 싶음과 쓸 수 없음의 사이에서 방황하며 젊을 때 연애만 하지 말고 책 좀 읽지 그랬니...라고 과거의 나를 책망하다가도 웃을 수밖에. 그땐 그게 제일 재미있었다고! 암요.


독서를 등한시한 과거의 나여, 차라리 고맙다. 네 덕분에 세상에 아직 읽을 책이, 만날 재미가 무수히 많고 많구나.

키키 키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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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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