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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Dec 03. 2022

기질은 가난, 특기는 기록

기록계의 짠순이

타워팰리스가 논밭이고 양재천이 똥물이던 시절부터 강남 8학군에서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성장했지만 내 기질적 특성 중 하나는 '가난'이다. 좋은 물건의 사용을 끝없이 유예하면서 '아끼면 똥 된다'라는 문장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왔다. 한때 가성비를 좋은 벗으로 여겼고, 심이 기저귀를 처음 살 때는 브랜드 별로 한 장에 얼마인지 따지느라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춘을 놀래켰다. 친오빠 앤드류는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가성비라고 일찍이 공언하고 나와 정반대 성향을 보이는 것을 보면 이런 기질은 가정 환경보다는 타고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기질적 가난은 나를 종종 우울하게 했다. 미친 듯이 바쁜 와중에도 가격 비교의 세계에 빠져 있다 보면 나 지금 뭐하고 있지... 하는 '현타'가 심하게 왔다. 러쉬아워의 택시 안에서 미터기의 요금과 함께 올라가는 건 죄책감이었다. 음식물 청소기 마냥 배가 불러도 음식을 남기지 못하고 내 뱃속에 버렸다. 안 쓰면 100% 할인인데 20% 할인 쿠폰이 아까워서 필요도 없는 것들을 쓸어 담았다. 알뜰과 궁상 사이에서 부유하던 서른다섯, '내 시간이 제일 비싸고 내 몸은 쓰레기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후 나는 얼마간 자유로워졌다. 내 영혼을 갉아먹던 무시무시한 가격 비교의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인간의 기본 성향은 잘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현명하지 않은 소비가 없는 알뜰한 생활이 좋다. 산책가가 된 이후로는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의 저자 폰 쇤부르크의 문장-그와 반대로 가난해지는 사람은 선구자에 속한다. 결국 머지않아 우리 모두, 정말로 모두가 예전보다 한결 더 가난해질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우아하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법을 빨리 터득할수록 더욱 근심 걱정 없는 삶을 누리게 된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욕구를 품은 사람들만이 부자로 살 수 있다. 비록 은행 잔고가 줄어들지라도, 다행히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일들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을 가슴에 품고 '가난하게 걷기'를 마음껏 즐겼다. “가난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능력보다 더 큰 노후 대책이 있을까요?”라는 고미숙 선생님의 얘기에 뿌듯하기도 했었다.


기질적 가난과 알뜰한 성정이 가장 긍정적으로 발휘되는 분야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기록이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아끼고 아껴서 되새김질해 이야기로 만든다. 잊고 싶지 않은 공간과 순간, 아이의 농담과 다른 이들의 칭찬까지 기록한다. 그때만큼은 나의 기질을 탓하지 않고 긍정하면서 혼자 낄낄 거리며 나만의 해석을 단다.


이슬아 작가가 자신의 책에서 재인용한 문장을 보고 무릎을 쳤다.


-뭔가를 쓰려고 하는 사람은 지독한 짠순이인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장면이 너무 아까워서, 어떻게든 가지거나 복원하려고 애쓰는 짠순이라고.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244p


이 짠순이는 나다. 어떤 장면과 말들이 한없이 아까울 때가 많다. 아무 사건이 없었던 하루라도 나만의 고요 속에 되돌아보면 적어도 한 번은 빛이 나거나 배꼽을 잡는 순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어제 감자빵인 줄 알고 식탁에 살짝 던졌던 게 사실은 계란 박스였고, '학감'이라는 이름의 심이 반 58번 친구는 성이 전씨라서 현재 그 초등학교에는 실존하지 않는 아이였다는 걸(전학감) 알게 되는 순간이 그렇다. 세기가 그랬어,라고 그래서 친구 이름인 줄 알았으나 이것 역시 열 살 아이들의 창의력 넘치는 욕이었다는... 쩜쩜쩜. 이 모든 빛나는 순간을 끌어모아 나만의 언어와 시선으로 남겨둔다.


정지우 작가가 그랬다. '사진과 동영상은 생생하게 그 순간을 살려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간일 뿐이다. 그 시절을 통째로 가장 정확하고 깊이 있게 기억하게 하는 건 그때의 이야기, 그 시절 남겨두었던 나의 언어들'이라고. 그러니 흘러가는 건 시간의 몫이고, 나만의 언어로 그 시간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의미를 건져 올리는 것은 기록계의 짠순이인 내 몫이다.


베이징에서 기록을 처음 시작한 뒤 나는 기록 전도사가 됐다. '도를 아십니까' 수준으로 갑자기 "같이 기록 생활하실래요?"라고 묻는다. 다들 마음은 있는데 뭘 기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음악이든, 음식이든, 책이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들로 작게 시작해 보면 된다. 기억은 무기력하지만 기록은 힘이 세다. 어떤 기록이든 그것은 결국 당신을 세심히 관찰하고 알아가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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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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