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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Dec 05. 2022

실패와 복기, 그리고 베이스캠프

이기는 것 못지 않게 좋은 것

몇 년 전 학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는데 심이가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놀라서 아이를 진정시키고 물어보니 오늘 시험에서 ‘fail’을 받았다고 한다. 70점 아래 점수를 받으면 'fail'인데 68점을 받은 것이다. 학원 시험에서 낙제할 수 있어, 괜찮아,라고 다독거리며 생각해 보니 이것이 아이 인생의 첫 '실패'다. 1월 생인데다 유난히 습득력이 빨랐던 아이는 뭐든지 앞서 나갔고 칭찬에 익숙했다. 아이는 차 안에서도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첫 실패의 추억은 이렇게 쓰라린 것이다.


그런 아이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아이 인생에서 앞으로 다가올 무수한 실패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머리가 띵해졌다. 이 실패는 아무것도 아니야, 앞으로 너는 훨씬 심각하고 엄청난 실패의 파편을 쓰나미처럼 맞이하게 될 거야...라고 진실된 충격 요법을 쓰고 싶었는데 차마 그럴 수는 없으니 그저 다독일 수밖에. 아이가 실패를 친근한 친구처럼 여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빨간 머리 앤의 목소리를 빌려오고 싶었다. '난 최선을 다했고 ‘경쟁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노력해서 이기는 것 못지 않게 노력해서 실패하는 것도 좋은 거야.'


앤처럼 멋진 문장이 기억나지 않아 '학원에서는 최대한 많이 틀려야 좋아, 아무도 안 틀리면 선생님이 심심하시잖아, 한 번 틀린 건 오래 기억하게 되니 오히려 효과적이야' 등등 아무 말 대잔치스러운 위로를 건넸다. 눈물, 콧물을 닦으며 아이는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아마도 '노력 끝에 얻는 실패는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따뜻하고 다정한 가족 분위기 안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나는 꾸중과 실패의 경험이 적어서 또래 친구들에 비해 맷집이 부족했다. 별것 아닌 일에 눈물부터 나고, 목소리가 큰 사람이 옆에 있으면 한껏 위축됐다. 급기야 선생님의 작은 꾸지람에도 서러움이 폭발해서 꺼이꺼이 울다가 소리 잘 지르고 욕도 잘 하는 엄마를 가진 배짱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신입사원 때도 화장실 변기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훌쩍거리며 조금 더 일찍 좌절하고 실패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정에서 어느 정도의 실패와 좌절의 경험은 필수적이구나... 여러 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나는 아이가 일찍, 많이 실패하고 좌절하기를 바란다. 실패나 고난 없는 인생은 없으니 차라리 그것에 일찍 익숙해져서 빨리 극복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유시민 작가의 문장은 나를 늘 불러 세운다. '상처 받지 않는 삶은 없으며 상처 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것.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가기에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 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러니 아이에게 제일 우선적으로 주고 싶은 능력이 있다면 바로 회복탄력성, 그리고 실패에서 배우는 '복기' 능력이다.




초등학교 시절 바둑을 배웠는데 제일 놀랐던 부분이 바로 '복기'였다. 이미 승패가 나온 경기인데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하나 하나 되짚어본다는 것에 놀랐다. 아니... 다들 그렇게 시간이 많으신가? 하는 어리숙한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지만 이창호 프로의 글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복기는 패자에게 상처를 헤집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지만 진정한 프로라면 복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복기를 주도한다. 복기는 대국 전체를 되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이며, 유일하게 패자가 승자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둘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창호, <부득탐승>, 194p


패자가 승자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니... 마음이 겸허해지는 엄청난 깨달음이다. 실패해도 된다. 오히려 제대로 실패하는 것이 좋다. '실패를 승리로 바꾸는 단 하나의 방법'인 복기라는 비장의 무기가 우리에게는 있다.


학생에게 복기의 영역은 오답 노트다. 나는 공부를 곧잘 했지만 오답노트를 등한시하던 학생이었다. 심지어 지나간 시험은 제대로 답을 맞히지도 않았다. 나의 최고 성적은 2등. 일등을 해본 적도, 기대해 본 적도 없다. 내 기준으로 1등은 오답 노트에 진심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였다. 작은 실수도 놓치지 않고 되짚어 기어이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 노력보다는 운에 의지해 70프로의 노력으로 100의 결과를 얻기를 바라는 나 같은 인간은 할 수 없는 것.


쓰기라는 영역에서 실패와 복기의 의의는 확고하다. 우선 모든 재미있는 이야기는 무언가에 실패한 일이다.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실패를 자처해야 한다. 김영하 작가가 <여행의 이유>에서 말했듯 타국의 식당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면 메뉴판 제일 위에서 고르면 되고, 여행기를 쓰고 싶다면 밑에서부터 주문해야 한다. 오리혀든 곰 발바닥이든 무언가 나와서 창렬하게 실패한다면 매우 인상적인 여행기가 될 것이다. 나의 베이징 산책기 또한 매일의 자잘한 실패들과 분노, 깨달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기란 더욱 절대적이다. 실패를 더듬어 상상을 더해 탄생한 이야기는 '퇴고'로 이어진다. 퇴고는 처음 쓰는 것보다 재미가 조금 떨어지지만 사실상 작가에게는 퇴고가 전부다. 김연수가 <소설가의 일>에서 정의하기도 했다. 소설가는 ‘자기가 쓴 것을 조금 더 좋게 고치'는 사람이다.




첫 실패의 아픔을 혹독히 겪은 아이는 이후 무수히 많은 실패(=70점 이하)를 경험하고 아주 무뎌졌다. 점수에 이렇게까지 담담해지길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48점을 획득하고도 돌아오는 길에 춤을 출 수 있는 맷집을 가진 인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 옆에 "아빠는 17점 맞은 적도 있었어"라고 신이 나서 위로해 주는 인간이 내 남편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모두 잦은 실패와 느린 복기를 지켜봐주는 정서적 베이스캠프가 필요하다. 베이스캠프의 위치가 외부에서 '나 자신'으로 변화하는 순간 인간은 성장한다. 나는 스스로를 베이스캠프 삼아 더 실패하고 기록하고 싶다.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열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곧 성공'이니 실패의 잔혹한 세상에서도 우리는 언제고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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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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