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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Dec 06. 2022

총합의 여정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도시산책자가 낯선 도시에서 받을 수 있는 공격으로 여러 번 언급했던 '오늘 쉽니다' 공격. 어렵게 찾아갔더니 쉬는 날도 아닌데 아무 설명도 없이 굳게 닫혀 있는 문.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다소 구겨진 A4 용지에 연필로 휘갈겨 쓴 발랄한 여덟 글자 '今天休息, 明天再见(오늘 쉴게, 내일 만나)'가 있었고 대부분은 아무 흔적도 없었다. 처음 서점을 탐방하던 초보 산책자 시절, 춘펑시시, 이딩슈워를 비롯해 열 개가 넘는 서점이 문이 닫혀 있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아까운 시간과 교통비, 언어적 한계 등을 생각하면 짜증부터 났다. 분노와 짜증은 낮맥과 주변 산책으로 풀었다.


굳이 이방인이라는 신분을 들먹이지 않아도 나는 원래 시간 낭비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효율적인 동선을 중시하며 길이 끝도 없이 막히거나 잘못 들어선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게 되면 쉽게 우울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자책하기도 하고, 은근슬쩍 옆 사람 탓으로 돌리기도 하면서 짜증 공기를 내뿜었다. 어느 날 닫혀 있는 서점을 뒤로하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발견한 펍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데 깨달음이 왔다. 동선의 효율성만을 따지며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인생에 정답이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으면서 정작 일상 속의 나는 변함이 없었구나. 목적지만을 향해 가지 않는 것,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부수적인 발견과 기쁨의 가치를 아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던 이방인의 산책이 아닌가. 거절과 헤맴의 여정을 사랑할 수 있는 산책자가 되면서 비로소 나는 산책자 중급 레벨로 진입할 수 있었다.


한정원 작가는 <시와 산책>에서 무언가를 만나러 다가가는 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당신이라는 목적지만을 찍어 단숨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소한 고단함과 아름다움을 거쳐 그것들의 총합이 당신을 만나게 하는 것. 그 내력을 가져보고 싶게 한다. 24p


설레며 가는 길, 헤매며 스치는 풍경들, 아쉬움 혹은 여운을 안고 돌아오는 시간. 모든 ‘소소한 고단함과 아름다움’의 총합으로 만들어지는 여정과 삶. 이 깨달음은 실로 위대한 것이어서 언젠가부터 나는 오늘 쉽니다 공격 앞에서 한없이 초연하며, 오히려 한 번 더 걸을 수 있음에 기뻐할 수 있었다.


'어떻게 가느냐보다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게 될까 봐 두렵다.'는 걷기의 대가 리베카 솔닛의 문장도 힘을 보태준다. 그녀의 시선을 빌려 두려움의 방향은 '닫혀 있는 그곳'이 아니라 '도착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는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도착과 목표에만 집착하면 우리는 쉽게 품위를 잃고 허무해진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아스널 FC를 22년간 이끌었던 축구 감독 아르센 벵거는 49경기 연속 무패 기록을 세웠다. 그는 축구의 본질을 품위에서 찾았다. 한때 그는 힘과 신체 조건의 우위를 활용해 어떻게든 골을 넣어 이기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섬세한 과정을 만들어 골을 넣고 승리하는 게 더 멋진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후 그는 아름다운 축구의 창시자로 불렸으며 감독 은퇴 후 일흔셋의 나이로 피파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축구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일이다.


아르센 벵거 감독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의 대한민국 축구팀이 우리에게 준 영감을 알아봐야 할 것이다. 오랜 시간을 통과해 고단함과 품위의 아우라를 뿜어내며 우리에게 온 그들은 승리도 주고, 영감도 줬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조금 더 단단하고 유연한 아이러니한 존재가 된 우리의 마음에 이 문장이 아로새겨졌다.


무수한 시간의 축적과 여정의 총합이 아닌 경기의 단면만 보는 이들은 그들의 플레이를 지적하고 평가할 자격이 없다. 수고했다는 인사도 넘치니 그저 그대들의 찬란한 여정에 잠시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이 순수한 기쁨은 한국 축구에 대한 꺾이지 않는 관심으로 갚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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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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