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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Dec 01. 2022

겨울 냄새가 묻는 날

날씨를 맞이하는 삶

일 년 중 하루 꼭 그런 날이 있다. 겨울 냄새가 처음 몸에 묻는 날. 내겐 어제가 그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심이 겉옷에서 겨울 냄새가 났다. 아이가 신발을 벗자마자 가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바로 이거야" 했더니 아이가 뭐냐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게 겨울 냄새라는 건데 너무 좋다. 겨울바람에서 나오는 건데 니가 묻혀 온 거야.

-그 냄새는 누가 정한 거야?

-엄마가. 근데 너도 맡아봐, 누가 뭐래도 겨울 냄새야.


그날 저녁 쓰레기를 버리고 온 내게 아이가 다가와 킁킁거리며 나를 흉내 낸다. 이거구나, 겨울 냄새. 우리는 겨울 냄새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귀한 사이가 되었다.


예전의 나는 겨울에는 여름을 그리워하고, 여름에는 겨울을 그리워했다. 비가 올 때는 햇살 쨍쨍하던 날을, 기분이 우울해지면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비가 내렸으면 했다. 그것은 짜장면을 시켜 놓고 짬뽕을 그리워하고, 짬뽕을 시키고 짜장면 먹을 걸 하고 후회하는 일과 비슷했다. 도무지 행복할 수가 없는 일 말이다.


게다가 베이징의 날씨란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너무 건조했다. 한 여름에는 아침에 눈뜨면 33도, 겨울에는 '살을 엔다'라는 표현이 몸으로 파고들었다. 봄에는 황사와 꽃먼지가 가득했고, 가을은 너무 짧아서 흔적조차 희미했다. 나는 매일 한 마리 투덜이가 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아침을 맞이했다. 한겨울 아침 아이를 보내고 집으로 걸어오던 시간, 너무 추워-라고 몸을 움츠리는 순간 함께 걷던 친구의 한 마디. 너무 좋다, 이 상쾌한 바람. 역시 겨울바람이야. 위대한 깨달음은 이렇게 갑자기 나를 두드린다. 


날씨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꿔야 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일 뿐.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각기 다른 종류의 좋은 날씨만 있을 뿐'이라는 윌리엄 쿠퍼의 말이 이렇게 바뀌어서 내 마음을 때렸다.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짜증 나는 네 마음만 있을 뿐'.


나는 노리코 씨처럼 매일의 날씨를 기꺼이 맞이하기로 했다.


비 오는 날에는 비를 듣는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바라본다.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몸이 갈라질 듯한 추위를 맛본다. 어떤 날이든 그날을 마음껏 즐긴다.


모리시타 노리코, <매일매일 좋은 날>


오늘의 날씨를 사랑하는 세계 안에서 아이와 나는 새로운 것들을 함께 배웠다. 여행에서 비가 오면 우울해지는 대신 빗소리를 듣는다. 옷이 듬뿍 젖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다. 눈 밟는 소리는 문 여는 소리를 닮았다. 사진에 가장 멋지게 담기는 것은 흐린 날의 구름이다. 비와 함께 즐기는 야외 수영장은 두 세배 재미있다. 이곳에 햇살이 내리쬐면, 비가 오면, 눈이 오면 어떨지 상상하는 마음을 가지는 건 하루를 두 번 사는 일과 비슷하다. 진짜 위대한 것들은 형태가 없다.


어차피 영원히 추울 수도, 영원히 더울 수도, 비가 그치지 않을 일도 없으니 고유한 지금을 그저 맞이한다. 그러고 보면 날씨는 꼭 인생을 닮았다.


-오늘 밤 비가 올 거예요.

-그냥 내리게 내버려 둡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처럼 엄청난 폭풍이 불어대고 있었다.

하늘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 일을 열심히 했다.


줄리언 반스, <영국, 영국>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하늘을 그저 그렇게 두며, 맞이하는 것의 진짜 의미를 배워가며, 조금씩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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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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