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간의 자유, 어디로 떠날 것인가 (ft. 열 살 아이)
1.
춘의 제안은 일종의 벼락같았다. 평온했던 내 일상을 아작내는 듯한. 한없이 기쁘지만 막막하면서, 걱정과 설렘이 정확히 절반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여행을, 그것도 꽤 장기인 3주 동안 갈 수 있다는 제안이었는데, 겨울이었고, 열 살 아이와 함께였다. 혹자는 '그러면 여름에 가면 되지!'라고 하겠지만 베이징에서 쓰지 못했던 춘의 진급 휴가는 정확히 올해 2월 21일 전에 끝나야 한다고 했다. '3주가 부담스러우면 줄여서 가면 되지'라고 하겠지만 '회사 소속 노예'의 신분으로 향후 10년간 이렇게 긴 여행은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 이 제안은 거절할 방법을 상실한 초대장과 흡사했다. 그렇게 2023년 겨울, 덜컥 3주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최근까지 5일 이상의 장기 여행은 좌절 혹은 단념의 다른 이름이었다. 코로나 발발 초기 홍콩 여행은 디즈니랜드 폐쇄와 우리의 절규로 마무리됐으며 베이징 생활 마지막 여행 코스로 점찍어두고 몇 년을 기대해 온 운남 여행은 출발 하루 전 코로나 재확산으로 인한 비행기 전편 취소와 '에잇, 여행도 못가는 거 술이나 마시자'는 광란의 백주 파티로 일단락됐다. 귀국 후에는 한국 생활 적응 퀘스트로 인해 해외로 눈을 돌리지 않았었는데... 3주라니! 무려 3주라니! 스물일곱, 무모하기 짝이없던 3주간의 남미 여행 이후 제일 긴 시간이 아닌가. 한동안 죽어 있었던 여행 세포가 마구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야 할까? 아무나 붙잡고 '3주가 있다면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은가'하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몇몇에게 물어보았다.)
처음 우리의 계획은 호주와 뉴질랜드 남섬 캠핑카 투어였다. 추운 겨울이니 따뜻한 오세아니아 대륙에 가서 캠핑카를 빌려 천혜의 자연을 만끽하기. 서핑도 배우고, 스카이다이빙도 하고…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 아닌가. 그런데 자꾸 두 눈이 유럽으로 돌아갔다. 아이와 함께 유럽을 걷는 것은 내 오랜 버킷리스트였고 겨울이라는 변수만 빼면 소원을 이룰 기회가 코앞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영국 국제 학교에 다닌 아이는 예전부터 가끔 본인을 영국인이라고 착각하며 학교에서 배운 영국 역사와 문화, 관광지(빅 벤이나 런던아이, 런던탑 등)를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겨울에 런던이라니 생각만 해도 우울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특히 추위에 민감하다.)
세계 지도를 펴고 그나마 덜 추운 겨울을 가진 유럽 도시를 물색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었다. 12년 전 결혼 직후 둘이 다녀온 스페인은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여행지였고, 특히 안달루시아 지방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포르투갈까지 가볼 수 있는 기회였다. 즐겨보던 예능 프로그램 <비긴어게인>에서 김윤아님이 '샤이닝'을 열창했던 아름다운 도시 포르투와 야간열차와 페소아의 도시, 리스본. 포트와인과 에그타르트의 나라.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졌지만 마음에 걸리는 사소한(?) 한 가지는 아이였다. 많이 걷고, 많이 봐야 하는 유럽 여행을 과연 열 살 아이와, 그것도 3주라는 긴 시간 동안 무사히 할 수 있을까? 역시 휴양지 쪽이 모두를 위한 올바른 선택이 아닐까?
도서관에서 호주와 이베리아반도 관련 책들을 잔뜩 빌려 훑어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는데 스페인 코르도바의 로마교 사진을 본 순간 또 다른 벼락이 찾아왔다. 그래! 걱정일랑 접어두고 이베리아반도로 가자. 가서 아이에게 가우디 건축과 타파스의 매력을 알려 주며 개고생을 해보는 거야. 유노, '트래블(travel)'의 어원이 트레바일(travile), 즉 고생, 고난입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명카피도 있었죠. 마음을 먹자 갑자기 세상이 환해졌다.
2.
장소를 정하니 여행 준비에 속도가 붙었다. 2월 초에 출발하는 20박 21일의 이베리아반도 여행. 스페인에서 2주, 포르투갈에서 1주 머무는 코스로 구상했다. 처음에는 여유로운 여행을 꿈꿨으나 정보를 모을수록 가고 싶은 도시가 추가되어 결국 스페인 7개 도시, 포르투갈 2개 도시, 경유지 헬싱키 반나절 산책까지 총 열 개 도시로 추려졌다. (장기 여행은 결혼 준비와 비슷하다. 언제 또 이렇게 해보겠어!라는 마음가짐으로 욕망이 무한 팽창된다.)
핀에어 티켓을 예매하고, 호텔과 도시별 이동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니만큼 숙소 예약이 관건이었다. 한국과 중국 호텔에서는 킹베드에 셋이 잔 적도 많았는데 유럽은 소방법 규정이 엄격해서 아이도 엑스트라 베드를 이용해야 했다. 헌데 각 호텔별로 나이 규정과 세부 기준이 달라 일일이 호텔에 메일을 보냈다. 우리는 열 살 아이와 함께 갈 거야. 너희 규정을 알려다오! 어떤 호텔은 스탠다드 룸에 엑스트라 베드를 넣으면 되었고, 어떤 호텔은 슈페리어룸부터 넣을 수 있었으며, 어떤 호텔은 아이도 성인으로 간주했으며, 어떤 호텔은 13살 미만이면 침대에서 함께 자는 것이 허용되었다. 한 마디로 생난리가 났다.
각 도시별 여행 방법에 따라 숙소의 기준이 달라져야 했기에 (관광 위주로 돌아볼 도시에서는 위치 중심으로, 쉬고 싶은 도시에서는 호텔 컨디션을 중점적으로 봤다) 우선 도시별 대강의 일정을 짜고, 그 일정에 맞는 호텔을 2-3개 리스트업 하고, 우리 일정에 예약 가능 여부와 엑스트라 베드 조건을 검색해 호텔에 메일을 보내고, 공식 홈페이지와 아고다 가격을 비교했다. 그렇게 고개를 들어보면 매일 새벽 5시. 부지런한 다크서클이 입술까지 찾아왔다. 어른들이 왜 패키지여행을 선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여행에서 역할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ENFP인 내가 호텔과 일정, 맛집 등을 본능과 감각에 이끌려 준비하고, ESTJ인 춘은 이동과 통신(가끔 예약까지)에 관한 모든 것을 이성과 숫자에 기반해 책임진다. 내가 여행 루트를 '대강' 짜면 춘이 가장 효과적인 동선과 이동 방법, 합리적인 가격표를 '꼼꼼하게' 만들어오는 식이다. 이번에도 비슷했다. 내가 영감에 기반해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들어가서 안달루시아 지방을 렌터카로 돌고 리스본이나 포르투로 아웃하자!고 했더니 날짜별, 항공사별, 인아웃 도시별로 스무 가지가 넘는 경우의 수가 담긴 엑셀이 도착했다. 춘은 도시별 이동 방법을 정해 예약하고 렌터카까지 결정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코르도바까지는 렌페를, 코르도바에서 이후 안달루시아 지방 6개 도시는 렌터카로, 포르투까지는 비행기로, 리스본까지는 다시 열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전형적인 P형 인간으로 살아온 나지만 나이가 들면서 굉장히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서 혹시 그새 J가 되어버린 것인가 우려했는데 춘의 엑셀을 본 순간 아니라는 것이 판명 났다.
준비 과정 중 가장 노력을 들인 부분은 바로 네이버 여행 카페 <체크인유럽> 회원 등업이었다. 23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하루에 1,000개 이상의 글이 업로드되는 그 카페를 본 순간 유레카!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일 탐났던 것은 '단독여행코스 연구소'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가진, 각 도시별 추천 경로와 맛집이 구글 맵과 연동되는 서비스였는데 여행지에서 정말 유용할 듯했다. (퍼스트 회원이 되면 주제별 가이드북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
이를 위한 조건은 딱 하나. 그 카페의 비즈니스 회원이 되는 것. 자, 그럼 어찌 비즈니스 회원이 될 것인가. 조건은 아래와 같았다.
-게시글 7개, 댓글 수 80개, 방문 횟수 20회
두둥! 댓글 수 80개라니... 인터넷 카페에서 글 한 번 제대로 쓴 적 없는 내게는 매우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숫자였다. 하지만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이후 내 여행 준비의 팔 할은 그 카페에 열심히 댓글을 다는 일로 이루어졌다. (여행 일주일 전 등업에 성공했다. 따봉(ta bom)! '좋다'라는 의미의 포르투갈어다.)
주도면밀의 대명사 춘은 바르셀로나에서 요즘 특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소매치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다이소에서 각종 자물쇠와 핸드폰 연결 스프링, 힙색을 구입했다. 자물쇠가 주렁주렁 달린 그의 가방을 보고 있자니 내가 소매치기라도 이 가방만은 훔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한결 안심했다.
한식 마니아 심이를 위해 18개의 작은 컵라면을 일일이 분리해서 면 따로, 컵 따로 포장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햇반과 본죽 장조림, 김, 볶음 고추장, 초장, 볶음 김치도 챙겼다. 로컬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해 호텔 조식도 거부하고 맛집을 중심으로 1일 4식 하던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해 본 일이다. 정교하게 면과 수프를 분리하고 있자니 아이가 아니라 꼭 어르신을 '모시고' 가는 느낌이라 '현타*'가 왔지만 햄버거나 피자, 빵을 거의 먹지 않는 아이가 있다면 꼭 필요한 준비물이다.
*현실자각타임의 준말로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실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죠... 예...
심이도 특별한 여행 준비를 했다. 유튜브로 여행 정보를 좀 살펴보라고 했더니 '소매치기 당하지 않는 법', '소매치기당한 후기' 영상 등을 잔뜩 찾아보고 있었던 것. 원래 걱정이 많은 아이의 얼굴이 아주 어두웠다.
3.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님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하신 이 문장,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제 여행의 바이블이 된 느낌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유시민 작가는 <유럽 도시 기행>에 이렇게 적었다. '도시는 콘텍스트를 아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주며 그 말을 알아듣는 여행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라고. 도시의 콘텍스트라니... 이 무슨 매력적인 단어인가. 그러니 여행에는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함께 필요하고,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사실 이십 대의 여행은 지금보다 더 즉흥적이고, 무지했다. 별 계획 없이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렀다. 그래도 즐거웠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여행보다는 그 공간을 조금 더 이해하는 여행, 공부해서 제대로 볼 수 있는 여행을 선호하게 됐다. 베이징에 오래 살면서 역사 도시 시안을 비롯해 중국 도처를 여행하다 보니 이런 여행에 대한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알고 보면 더 많이, 더 잘, 더 자세히 보이는구나. 여행이 끝나고 비로소 그 지역과 역사에 대해 새로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 특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알아야 할 역사, 문화, 건축,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도서관과 밀리의 서재에서 열심히 읽어야 할 텍스트를 찾아 다운로드하고, 이베리아반도를 다룬 벌거벗은 세계사, 세계 테마 기행, 짠내투어, 선을 넘는 녀석들, 꽃보다 할배, 25시 톡파원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틈틈이 봤다.
여행을 준비하며 또 하나 획기적인 아이템을 발견했는데 바로 투어라이브의 오디오투어였다. 여행하는 도시의 원하는 콘텐츠를 다운로드해서 들으며 여행하면 된다. 별 기대 없이 찾아봤는데 실제 가이드 투어에 버금가는 전문성과 현장성이 있었다. 특히 스페인 지역 콘텐츠가 많아서,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과 코르도바 메스키타 등 유적지에서 잘 활용할 수 있을 듯했다. 가우디 건축물 투어, 바르셀로나 근교 투어 등은 마이리얼트립에서 현장 가이드를 신청하고 나머지 도시에서는 대부분 투어라이브의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하기로 했다. 새로운 형태의 여행이 될 것 같아서 가슴이 뛰었다.
많은 도시를 가는 만큼 변화무쌍한 날씨를 대비해 옷은 6겹을 겹쳐 입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헬싱키에서 6겹이 된 우리의 옷들은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코르도바를 거쳐 말라가, 세비야에서 2-3겹 정도로 줄어들었다가 리스본, 포르투에서 다시 늘어날 것이다. 평소 챙겨 먹지도 않던 영양제를 먹으며 컨디션을 조절하면서 관련 책과 후기를 열심히 읽었다. 여행을 준비할 때 늘 철없이 설렜는데 이번에는 비장함이 자꾸 찾아온다. 걱정과 기대가 마구 뒤섞여 마음에 찰랑거리고 있었다./
*12년 전 필름으로 찍은 스페인 사진들을 다시 들춰보다.
*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공감과 댓글은 지속적인 콘텐츠 업로드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