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는 <패션과 쇼핑은 인생 그 자체>라고 생각하며 매주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와 동대문을 휩쓸던 소녀였다. 서른이 지나면서 쇼핑의 즐거움을 예전처럼 찾지 못하자 ‘인생의 소비 총량은 정해져 있는 것인가’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리고 중국에 와서 한동안 쇼핑을 끊었다.
이곳에서는 일도 하지 않는 데다, 그간 철저한 소비 위주의 삶을 살아와서 이제는 소비가 완전히 질렸던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보다 큰 이유는 중국어가 전혀 안되기 때문이었다.
대형 온라인 쇼핑몰인 타오바오나 징동을 열어도 아무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토론’, ‘교류’, ‘단련’ 같은 세련된 어휘들은 그곳에 없었다. 이미지만 대강 보고 사는 것이 겁이 났고, 일일이 찾아보자니 귀찮았다. 대부분의 소비를 근처 슈퍼에서 하고, 정말 필요한 생활용품 중심으로 춘에게 부탁해서 사곤 했었다.
더듬더듬 글자를 읽고, 파파고에 이미지를 띄워 번역을 하는 등 요령이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소비가 늘어났다. 특히 지난 11.11 광군제 때는 모든 세일이 그런 것처럼 ‘지금 안 사면 손해’인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이것저것 질러 보았다. 생민 오라버니가 안 사면 100% 세일이라고 했는데, 쩝.
중국에 와서 소비를 해 보니 한국보다 훨씬 간편하다.
모든 곳에서, 심지어 노점상에서도 모바일 페이가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생활한 지난 일년동안 현금을 썼던 날은 손에 꼽는다. 비밀번호조차 필요 없이 웨이신이나 즈푸바오의 QR코드로 모든 것을 계산한다. 직장인 시절, 홍보 생활에 늘 이용했던 ‘지갑 없는 세상’이 이곳에는 이미 도래했고, 간편 결제가 우리의 과소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필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는 더 이상 그냥 우스갯소리만은 아니게 되었다.
추천 알고리즘도 상당히 좋다. 내가 한 번이라도 찾아본 분야의 물품들은 내가 구매하지 않았다면 메인 화면, 결제 완료 화면 등 다양한 공간을 활용해 지속적으로 추천해 준다. 마치 나만의 서비스인 듯한 느낌으로 다양하게 추천해주니 계속 보고 있자면 “너 이래도 진짜 안 살래?” 이런 느낌.
인력 천국인 중국이니 택배는 말할 필요가 없다. 싸고 빠르다. 징동닷컴에서 물건을 사면 그날 저녁에 바로 도착하거나, 다음 날 도착한다. 출근길 학교나 회사 앞거리에는 택배 박스가 넘쳐 난다. 택배비는 대부분 무료고, 있더라도 천 원을 넘는 경우는 드물다. 식당 등에서 배달해주는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식사를 주문해서 먹는 문화가 퍼져 있어서 그런지 거리에도 전화기를 보며 콜을 기다리는 배달원들이 넘쳐난다.
학교 선생님은 상점들 대부분이 평소에 파는 가격보다 우선 올리고, 그다음에 평소 가격으로 비슷하게 깎아서 엄청 할인하는 척을 하는 것이 광군제!!! 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셨지만 나는 여러 개 질렀다. 지르는 품목이 예전과 심히 달라졌다는 것이 포인트겠지만.
우선 '차이슨'이라 불리는 무선 청소기를 샀다. 찾아보니 종류가 여러 가지던데 D-531 모델이다. 다른 모델들보다는 다소 비싼 가격이지만 먼저 써 본 친구에게 추천을 받은 믿을 수 있는 제품으로 구입했다. 하루 만에 도착한 무선 청소기로 새 세상을 맛봤다. 흡입력 등은 살림 초짜인 내가 알 수 없는 분야고, 우선 청소기를 돌리는 것이 전혀 귀찮게 느껴지지 않는 것만으로 성공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쉭쉭 돌릴 수 있으니 그게 어디냐며. 예전에는 절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며.
'차립스'라 불리는 산본의 에어 후라이어도 샀다. 아는 언니에게 추천받은 제품은 다른 모델이었지만 그 제품이 품절되어 다른 걸로 구입했다. 모든 것을 기름에 튀겨 먹는 중국식에 대항하며 나는 모든 것을 공기에 튀겨 다이어트를 하리라,는 강력한 의지보다는 감자튀김과 치킨 홀릭인 심이를 위해서다.
미니오븐도 진작에 샀다. 중국으로 이사 오면서 산산 조각난 광파오븐의 빈자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스콘’이 너무 먹고 싶었다. 이곳의 스콘은 너무 비싸고 맛도 별로이므로, 그냥 앞으로 해 먹자, 싶어서 스콘 전용 미니오븐을 17,000원 주고 샀다. 생각보다 더 작아서 장난감 같은데 가성비는 너무 훌륭하다.
샤오미의 아이 시계는 오후 10시에 주문했는데 아침 10시 전에 도착했다. 절대 환불 못하게 만드는 놀라운 스피드. 엄마, 아빠랑 연결되어 있어 아이가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고, 음성 메시지와 전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는 아이들은 대부분 이걸 가지고 다녀서 춘이 구입했는데 본인에게도 전화기 비스름한 것이 생겼다는 것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심이가 시도 때도 없이 유치원에서 접선을 시도했다. 학교에 있는데 전화해서 엄마 수업 잘 듣고 있어?라고 확인을 하지 않나, 하원할 때는 엄마, 나 지금 출발하는데 내려와.라고 말하지를 않나, 오늘 우리 집에 ** 놀러 가려고 하는데 괜찮아?라고 통보를 하질 않나 너무 맹렬하게 사용해서 다소 난감했는데, 3일 가지고 다니더니 불현듯 이제 시계를 가지고 다니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유는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싶어 해서라나. 이유도 기특하고, 어쨌거나 반가운 결정. 은재의 음성 메시지를 들었던 며칠 동안 참으로 즐거웠던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은재 옷도 몇 가지 샀다. 중국산 품질 괜찮을까… 걱정을 잠시 했다가 내가 한국에서 산 옷들도 대부분 중국산이라고 생각했더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풍선도 사고, 도미노도 사고, 배드민턴 채도 샀다.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면서 나름 뿌듯해했던 봄, 여름을 지나니
“말만 해, 타오바오에서 엄마가 다 찾아 줄게"라며 의지를 불태우는 내가 있다.
선생님이 그러셨지. 중국인들은 타오바오를 ‘万能的淘宝’라고 부른단다.
그리고 이런 말도 있다고 한다.
'不怕买不到, 只怕想不到’
사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말고, (브랜드나 물건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생각만 하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뜻!)
이렇게 생활 중국어가 느는 것 아닐까?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