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헛제삿밥'이 나오는데 은재가 소리쳤다.
"엄마 나 저거, 정말 먹고 싶어."
마치 소울푸드를 찾은 것처럼, 들뜬 목소리.
원래 나물 마니아이긴 하지만 6세 어린이가 먹고 싶은 헛제삿밥이라니 웃음이 났다. 헛제삿밥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몰랐던 나는 비슷하게 흉내나 내야겠다 싶어, 배달의 천국인 이곳에서 8가지 나물 세트를 주문했다. 20분 만에 도착!
간고등어를 급하게 굽는 동안 은재는 좋아하는 나물들을 밥에 얹어서 간장 양념으로 야무지게 비볐다. 쌉싸름한 맛이 도는 도라지를 빼고는 은재는 모든 나물을 사랑한다.
은재는 입을 오물오물거리며, 아무 말도 없이 엄지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든다.
2주 연속 우리의 주말 메뉴는 헛제삿밥이었다.
가끔 은재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들이 너무 토속적이라서 놀라곤 한다.
거의 아재 수준의 입맛.
제일 좋아하는 건 시금치나 콩나물 같은 나물, 된장국에 들어간 조개나 바지락, 멸치볶음, 그리고 역시나 (내 딸이니) 빠질 수 없이 떡볶이와 치킨이다.
기본적으로 밥과 면이 좋고, 빵을 싫어한다. 제일 싫어하는 게 생크림.
어린이라면 응당 흥분해야 할 친구들 생일 파티 당일에 유치원 가기 싫다는 이유가 ‘케이크 먹어야 하니까’였다.
그리하여 주말 아침 따뜻한 커피와 베이글을 먹고 싶어 하는 엄마를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나도 어릴 때는 완벽한 토종 입맛이었다.
엄마가 가끔 피자를 시켜주면 그 느끼함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당시 핫했던 베니건스에서 저녁을 먹은 날이면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먹으며 ‘개운해’했고, 웨스턴 스타일의 친오빠는 늘 촌스럽다고 부끄러워했다. 초등학교 때는 매콤한 ‘미더덕찜’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였다. 입에서 매콤미끌한 미더덕이 탁 터지는 그 재미있는 느낌을 좋아했다.
그리고 멸치볶음.
멸치볶음을 하는 날이면, 늘 엄마의 요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따뜻한 흰밥 위에 갓 완성된 멸치볶음을 한가득 올려 야무지게 비벼서 그것만으로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짭짤하고 달콤하고 과자 같은 멸치볶음. 환상의 맛.
지금도 은재를 위해 멸치를 볶다 보면 그 시절 요리를 하던 엄마의 뒷모습과
‘언제 끝나지’ 싶어 매의 눈으로 그 주위를 배회하던 내가 생각 난다. 나를 닮은 은재는 그때의 나처럼 새하얀 밥 위에 멸치볶음을 올려 한 그릇을 비운다.
돌고 도는 인생, 돌고 도는 입맛.
은재의 식성과 식탐은 사실 유명한데
3살 때 어린이집 알림장에는
"심이가 점심을 3번이나 더 달라고 해서 자제를 시켰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고,
그다음 주에는 "아이에게 숟가락이 작은 듯하니 큰 걸로 보내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중국에서 만난 첫 번째 선생님은 "은재 밥 먹는 것만 봐도 잃었던 입맛이 돌아올 것 같아요, 어머니!"라고 말하셨더랬다.
정말 맛있게, 많이 먹는 은재.
내 아이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어른들이 왜 말씀하셨는지 깨달으며
춘과 나는 가끔 아주 멍하니 은재가 먹는 걸 바라본다.
하루는 된장찌개에 넣은 조개를
어찌나 쏙쏙 잘 빼먹는지 감탄하고 있었는데, 다 먹은 조개껍데기로 국물을 계속 양껏 퍼먹는 거다. 그런 건 어디서 배우지 않아도 본능이 알려주는 것일까?
재빠른 손놀림으로 국물을 어찌나 후루룩 짭짭 맛있게 먹는지 나도 모르게 “너 소주 한 잔 할래?”라고 말할 뻔했다나 뭐라나.
그녀는 조개껍데기 산을 남기고 쏜살같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