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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Nov 21. 2023

유감없이 충분하게

눈물을 닮은 짭짤한 프레즐을 먹으며

1.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고 시집 제목이다. 그가 죽기 전에 정해둔 표제명이라고 한다. 어떤 삶을 살아야 우리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충분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시인이 남겨둔 이 따스한 시집의 이름이 자기 삶에 대한 '자부와 만족으로서의 충분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충분함'은 자신이 살면서 우연히 스치고 만난 것들에 대한 '헌사로서의 충분함'일 것이다. 나의 자족적인 충족감이 넘어서는 것, 빈자리에 기꺼이 타자들을 들여오는 것, 바로 그 만남에서 인간은 충만한 사랑을 얻고 그 사랑에 힘입어 팥죽을 쑬 수 있을 것이다. 


고영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33p


나이가 들 수록 좋아하게 되는 형용사는 '충분하다'가 아닐까 싶다. 완벽한 것도 좋고, 아름다운 것도 좋지만 충분하다면 충분하니까. 


2.

충분했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삶이라면 어떨까. 


드라마 <서른아홉>의 주인공 미조는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절친 찬영에게 부고 리스트를 받는다. 미조는 그 부고 리스트를 브런치 리스트로 바꾸어 버린다. 햇살이 쏟아지는 브런치 카페에 찬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카페에 도착한 찬영은 오래 정을 나눠온 지인들과 마지막 인사를 한다. 


제일 행복하고 신나는 장례식을 직접 치르며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말은 건강검진 꼭꼭 하시라는 거. 


명랑하게 덧붙인다.


-충분하다는 말 드리고 싶어요. 어쩌면 남들보다 반 정도밖에 살지 못하고 가겠지만 양보다 질이라고, 저는 충분합니다. 부모님 사랑도, 사랑하는 사람 보살핌도, 친구들 사랑도 충분한 삶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여러분들 덕분에 더할 나위 없는 나의 인생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그녀는 울지 않는다. 


3.

<나를 가장 나답게>의 김유진 작가는 국어사전에 열 개가 넘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는 '잘'이라는 단어의 적합한 의미로 여덟 번째쯤에 올라와 있는 이 뜻을 생각한다. 


유감없이 충분하게.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 유감없이 충분하게, 그렇게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나도 '잘'의 의미를 재정의해본다. 


'잘' 쓰고, '잘' 사랑하고, '잘' 살고 싶다. 

하루하루 유감없이 충분하게, 가장 나답게.


+

그나저나 원산지가 독일인 프레즐이 장례식 때 나눠주던 빵이었다는 걸 아시는지요. 오래전 독일의 슈바벤 지방에서 밀가루 반죽으로 부장품인 반지나 팔찌 등을 빚어 장례식장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프레즐의 이름 또한 옛 독일어로 팔찌를 의미하는 '브레치텔라'에서 유래됐습니다. 


프레즐에 뿌려져 있는 짭짤한 소금이 문득 눈물처럼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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