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받은 러브 레터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하교 시간이면 대부분 집에서 우리를 반겼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집을 비울 때면 A4 용지에 커다란 글씨로 쪽지를 써서 탁자에 올려두었다. '사랑하는 예삐'로 시작해서 '사랑해'로 끝나는 쪽지였다. 내용은 매번 조금씩 달랐지만 학교생활의 안부, 부재의 이유와 사과, 간식 정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 사랑의 표현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엄마 껌딱지였던 내게 엄마의 부재는 아쉬운 것이었지만 쪽지를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서 간혹 그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 쪽지들이 내가 받은 인생의 첫 러브 레터일 것이다. 시보다 더 시 같은 문장들을 읽으며 자랐다.
베란다라는 장소는 더욱 시적이다. 엄마는 언제나 낡은 아파트의 8층 베란다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이 아파도 그 루틴은 매일 이어졌다. 외출 시 베란다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드는 것은 나의 루틴이기도 했다. 유년 시절의 나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깡충깡충 뛰면서 발랄하게 손을 흔든다. 사춘기 시절에는 돌아보지 않고 쌩하니 가버리는 것으로 반항심을 표출했다. 모퉁이를 돌면 늘 후회했다. 행여나 고개 돌리지 않을까 쓸쓸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을 엄마가 그려져서. 멀리 갔다가 다시 뛰어와 손을 흔든다. 내가 진작 시야에서 사라져도 엄마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독한 수면 장애와 무기력증이 엄마를 덮쳤을 때 엄마는 처음으로 그곳에 서 있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별것 아닌 그 사실에 슬픔에 빠져 지내다 알게 된 사실은 내 마음 깊은 곳에 801호 베란다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 그곳에서 엄마는 언제나 손을 흔들며 서 있다. 그 웨이브가 만들어내는 아름답지만 강한 무언가는 녹록지 않은 세상을 버티는 힘이 되고 오기가 됐다. 하루를 더 충만하게 보내고 싶은 근원이기도 했다. '까대려고 번호표 받고 기다리는 사람들 천지'인 세상으로 나아가는 나를 위한 응원과 지지의 실체였다.
처음 처방받은 안약은 5개. 크라비트, 오큐메토론, 프레드벨 등 이름도 하나같이 길고 어려워서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어떤 것은 하루에 두 번, 어떤 것은 하루에 네 번. 두 시간에 한 번씩 넣어야 하는 것도 있었다. 몇 개는 넣기 전에 흔들어야 하고, 안약 투약 시간은 최소 5분간의 텀이 필요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환자가 다섯 가지 종류의 안약을 정확히 구분해서 제시간에 넣어야 하는 아이러니.
엄마를 위해 A4 용지에 커다랗게 안약 이름과 투약 시간을 썼다. 알람도 맞췄다. 일정대로 하루 스무 번 가까이 안약을 넣다 보면 하루가 갔다. 안약 투약 시간을 적은 그 종이는 내가 받았던 첫 번째 러브 레터에 대한 답장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