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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May 11. 2024

여행을 닮은 풍경

마음을 두껍게 두껍게 

엄마는 눈 안에 강력한 거미줄이 생겼다고 했다. 생겼다가 사라졌다 하는 검은색 거미줄. 엄마가 느낄 공포가 상상되지 않았다. 


입원 전 만난 담당 교수님은 아직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으니 '급성 바이러스로 인한 망막 괴사'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가정하고 치료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치료가 늦어지면 실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어 검사 결과를 마냥 기다릴 수 없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희망적인 이야기는 없었지만 따뜻하게 웃어주셔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상담 시 괴사 자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엄마가 한 달전 선릉의 모 안과에 들러 반점을 발견하고 주사를 맞은 바로 그 자리였다. 당시 의사가 오진을 한 것인지, 아니면 주사를 맞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우선 모든 의문을 접고 치료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집에 잠시 들러 작은 캐리어에 짐을 담았다. 치약, 렌즈, 수건, 속옷, 트레이닝복, 바디용품, 엄마복용약 등을 넣으며 깨달은 사실은 얼마 전 다녀온 대만 여행 짐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캐리어가 있는 병실 풍경 또한 흡사 여행의 풍경 같았다. 싱글 침대와 보조침대가 있는 아주 작은 숙소. 몸을 최대한 작게 만들어 간이침대에 누우니 스물두 살에 만났던 캐나다의 혼성 도미토리가 생각났다. 어떤 잠꼬대가 오늘 밤 나를 찾아올 것인지 복불복이라는 점도 확실히 비슷하다. 


여행자의 기운을 이어가기 위해 얼마 전 대만 타이베이 암바 호텔에서 선물 받은 핏플랍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슬리퍼는 촵촵 경쾌한 소리를 냈다. 한동안 우리의 집이 되어 줄 병원 구석구석을 걷는다.  


대학 병원 지하는 생각보다 훨씬 활기가 넘치는 장소다. 일부러 찾아가서 먹는 유명한 베이커리와 분식집, 서점, 선물 가게, 맛있는 돈가스와 부드러운 소프트아이스크림이 있었으니까. 아빠가 다니는 병원 마트 안에는 심지어 호두과자를 직접 구워 주는 코너가 있다. 풍경의 단면을 떼어보면 병원보다는 고속도로 휴게소와 비슷했다. 타이베이산 슬리퍼를 질질 끌며 생각했다. 역시 병원과 여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여행자의 기분으로 따끈한 호두과자를 먹었다면 좋았을 텐데. 


지하 소파에 앉아 문보영 시인의 에세이를 떠올린다. 문 시인의 엄마가 뇌 수술을 앞두고 한 말은 이랬다. '수술은 일종의 여행이며, 수술받는 시간은 비행시간이다'. 문 작가의 가족은 무서울 때마다 '이것도 일종의 여행이야'라는 카드를 농담처럼 사용한다. 병원 로비를 둘러보며 공항 같다고 장난치고, 곧 수속을 밟아야 하는데 여권 챙겼냐고 묻는 식으로. 문 작가는 수술을 마친 엄마에게 달려가 "편안한 비행 되셨습니까?"라고 물으려고 하지만 물 묻은 거즈를 입에 물고 호스를 단 엄마를 보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반복해서 곱씹었던 대목은 보호자가 환자보다 더 불안에 떨어서는 안되는 이유였는데 작가는 그것이 '환자의 공포를 가로채고, 공포에 관한 환자의 발화를 억압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러니 MBTI 극 F로 감정의 노예인 나지만 보호자의 신분이었기에 마음을 두껍게 두껍게 만들며 긍정의 신이 찾아오도록 자주 웃었다. 사실 눈이 보이지 않는 엄마와, 엄마 없는 세상을 상상하니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절망할 시간도 없었다. 오직 눈이 보이는 엄마를, 엄마가 있는 지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 


당분간 '괜찮을 거야, 안 불편해요, 다행이에요'라는 세 가지 대사만 입력된 로봇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불안과 부정은 엄마 몫으로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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