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뻔한 미식

맛은 뻔하지 않은 징기스칸과 수프카레

by 심루이

-홋카이도 여행 가요. 처음 갑니다.

-징기스칸과 수프카레를 드세요.


홋카이도 여행 전 마치 정해진 대사처럼 내게 도착한 메뉴가 징기스칸과 수프카레다. 어딘가로 떠나는 지인에게 그곳의 좋은 것들의 리스트를 건네는 마음만큼 다정한 게 있을까? 따뜻한 마음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징기스칸과 수프카레만큼은 꼭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스스키노와 심야식당

일본 콘텐츠 <심야식당>을 무척이나 애정해서 영상으로도, 책으로도(심지어 베이징에서 산 중국어 버전도 있다) 경험한 나로서는 일본 밤거리를 걸을 때마다 심야식당 오프닝 장면이 떠오른다. 차창에 비친 건조한 도시의 밤 풍경과 배경음악인 스즈키 츠네키치의 <추억>의 아련한 멜로디, 마스터 얼굴 흉터 자국과 무심하게 건네는 위로들도.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내일 먹을 메뉴는 정할 수 있잖아?

-사람은 말이야,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운이 나는 법이야.


당연한 이야기인데 절실할 때가 있다. 평범한 미소국에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찾는 것처럼. 삿포로 최고 번화가 스스키노의 밤을 걸으며 심야식당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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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마 징기스칸

여행 전 열심히 삿포로의 수많은 징기스칸 가게를 찾아본 결과 최고 맛집 '다루마 징기스칸'에 가고 싶었다. 그저 웨이팅이 무서웠을 뿐. 나의 다루마 공략법은 단순했다. 애매한 시간에 가자. 본점 말고 다른 곳을 노리자. 현재 삿포로 중심가에는 6개가 넘는 다루마 지점이 있고 그중 소문이 덜 난 곳을 찾았다. 불금 9시, 메가 돈키호테와 가까운 4.4지점에 갔는데 생각보다는 웨이팅이 짧았다. 20분 정도 기다린 후 안개 자욱한 공간에 앉을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 음식의 이름은 왜 징기스칸인가? 1920년대 만주 철도 총재였던 고마이 도쿠조가 이 요리를 처음 맛보고 칭기즈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양고기는 생소했는데, '대륙의 영웅' 이름을 붙여 강렬하고 보양에 좋은 음식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려 했던 마케팅적 의도가 있었다고.


홋카이도 대표 미식 징기스칸은 예전 군대 투구를 닮은 볼록한 불판에 굽는다. 제일 위에 양고기를 얹고 아래쪽에 양파와 파 등을 올려두면 고기 기름이 아래로 흘러내려 가장자리에 놓인 채소가 맛있게 익는다. 다루마의 고기는 기본 징기스칸, 상급, 안심으로 3종류. 다루마만의 수제 소스에 고춧가루와 마늘을 취향껏 넣어서 듬뿍 찍어 먹자. 흰밥과 김치와 함께 입에 넣고 삿포로 클래식 맥주로 입가심하면 완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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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소울푸드 수프카레

수프카레는 1970년대 삿포로에서 시작된 지역 요리. 최초로 수프카레가 등장한 곳은 '아잔타'라는 레스토랑이다. 당시 아잔타 주인은 인도 요리에 영감 받아 향신료를 듬뿍 넣은 따뜻한 국물 요리를 개발했다. 이후 맵기 조절이 가능한 '매직 스파이스'라는 수프카레 전문점이 등장했고 큰 인기를 끌면서 삿포로 수프카레는 일본 전역으로 확산됐다.


굳이 유래를 따지지 않더라도 홋카이도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뜨거운 국물이 절실했기에 걸쭉하고 진한 일본 스타일 카레가 이곳에서는 얼큰한 국물이 되지 않았을까? 영혼을 달래주는 건 역시 뜨끈한 국물이니까. 삿포로에는 수프카레 맛집이 많고도 많다. 수프카레 양대 산맥이라고 불리는 '가라쿠'와 '스아게' 사이에서 고민하다 스아게4 미레도점으로 갔다. 골고루 먹어본 결과 내 취향을 저격한 메뉴는 '바삭하게 구운 닭가슴살 수프카레'.


수프카레에도 징기스칸의 양파처럼 숨은 공신이 있다. 바로 브로콜리와 치즈밥. 브로콜리는 이미 홋카이도 야채를 설명하며 한 차례 극찬했으니 생략하고 치즈밥에 대해서 말해보자. 수프카레 치즈밥은 보통 슬라이스 치즈를 밥 위에 얹고 토치로 살짝 구워(아부리) 불맛을 입힌다. 밥 전체를 마는 것이 아니라 치즈밥을 국물에 살짝 적셔서 먹는 것이 포인트. 고소함과 매콤함이 오감을 자극한다.


내게 수프카레는 카레보다는 해장국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삿포로에 살았다면 해장 메뉴로 수프카레를 선택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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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무로 하나마루 회전초밥

해산물이 유명한 홋카이도에서 스시를 먹지 않을 수 없지. 하코다테에서 이미 원 없이 해산물을 먹었지만 회전 초밥은 몹시 다르다. 삿포로 3대 스시집이라는 네무로 하나마루(根室花まる)에 가기로 했다. 홋카이도 동쪽 끝 네무로항에서 직송되는 신선한 해산물을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어 인기가 많다. 소문대로 주말 웨이팅은 심각했다. 삿포로역과 연결되어 있어 접근성이 좋은 JR타워 스텔라플레이스점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새로 생긴 미레도점을 추천한다.


어느 지점을 선택하더라도 먼저 매장 입구 키오스크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한다. 번호표를 받았다면 웨이팅 현황을 모바일로 확인할 수 있으니 쇼핑, 카페 등 다른 스팟을 먼저 즐기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2시간 웨이팅 후 들어간 네무로 하나마루 원픽은 관자 스시였는데 부드러움의 끝판왕이었다. 홋카이도 관자는 알이 굵고 단맛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네무로 특산물인 게가 들어간 슴슴한 미소국 또한 인상적이다. 자연 그대로의 깊은 맛이라고나 할까. 그 외 모든 스시가 맛있었고 셋이 꽤 많이 먹었는데 10만 원도 나오지 않아서 다시 한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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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게 아니라 클래식

천편일률적인 코스가 싫어서 한때 삐딱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남들 다 먹는 뻔한 요리를 왜 먹어야 하지?" 그런 생각은 이제 이렇게 바뀌었다. "그럼 여기서 그것 말고 뭘 먹지?" 싱가포르에서 칠리크랩을, 베이징에서 베이징덕을, 타이베이에서 우육면을 먹는 것은 뻔한 것이 아니라 클래식이다.


홋카이도에 처음 간다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얘기해야지.


-징기스칸과 수프카레를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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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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