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베이징행의 향방을 알 수 없어 뒤척이던 지난 8월의 어느 늦은 밤. 전화가 올 리가 없는 야심한 시각에 침대 머리맡에 둔 핸드폰이 불현듯 울렸다. 일상을 깨는 의외성은 늘 슬픈 예감을 동반한다. 1주일 전만 해도 건강하셨던 외할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지셨다.
엄마, 아빠는 몇 시간 뒤 급히 부산행 기차를 타고, 나도 아이를 데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만남을 준비해야 했다. 코로나로 여러 가지 상황이 복잡하고 위험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딱 한 가지 사실 밖에는 없었다.
할머니를 만나야 한다.
타국에 살다 보면 갑작스러운 상실을 가족들과 제때 함께하지 못할 위험이 높아진다. 그래서 몇 년 전 친할머니의 마지막도 결국 베이징에서 전해 들었다. 그렇다 보니 지금 우리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국에 있고, 그래도 내가 할머니를 뵈러 갈 수 있다는 것이 코로나가 준 선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스크를 끼고 몸을 움츠린 채 아이와 함께 아주 오랜만에 타는 기차. 기차 여행은 늘 즐거웠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도, 정확한 상황도 잘 모르는 아이는 왕 할머니를 만나면 편지를 드리겠다고 열심히 색연필을 통에서 넣었다, 뺐다 분주했다.
삐뚤빼뚤, 하지만 아름다운 한 문장이 완성됐다.
‘왕 할머니, 언제나 사랑할께요’
코로나로 인해 엄격해진 병원 경비 때문에 아이는 결국 병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나도 첩보 영화의 주인공처럼 요리조리 길을 뚫어 할머니가 계시는 병실에 가까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콩닥콩닥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들어간 병실에는 온몸이 퉁퉁 부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낯선 할머니가 있었다. 불과 10일 전 전화 속 밝은 목소리로 내게 안부를 전해 주시던 할머니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할머니는 가쁜 숨을 내쉬며 내 이름조차 부르시지 못했다. 나는 생각보다 더 위중한 할머니의 상태에 놀라, 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도 못한 체 아이가 전해 준 종이만 들고 엉엉 울고 말았다.
딸이 태어나면 제일 하고 싶었던 게 ‘모녀 4대’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할머니-엄마-나-딸아이로 이어지는 우리의 귀한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 아이 돌 즈음 부산에 계시던 할머니가 서울 우리 집에 잠시 머무시는 동안 그 꿈을 이뤘다. 우리 집 소파에서, 한강 유람선에서, 유람선을 기다리는 선착장에서 우리는 한 개의 프레임이 담겼다.
할머니가 내려가시고 나는 그 사진을 아주 오래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앞으로 내게 남은 생의 순간순간에 나는 자주 그 사진을 바라보게 될 것을 예감했다. 나는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슬펐다.
결국 할머니는 최악의 위기를 이겨내시고 중환자실에서 나오셔서 요양병원으로 옮기셨다. 아직 자유롭게 음식을 드실 수는 없지만 한 번씩 죽은 드실 수 있다고 했다. 한 번의 안타까운 만남을 뒤로하고 나와 아이는 북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왜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했을까, 왜 한 번 더 모녀 4대 사진을 남기지 못했을까. 왜 한 번 더 전화를 드리지 못했을까… 왜 한 번 더… 왜 한 번 더…
수많은 ‘왜 한 번 더’와 ‘만약에’는 내게 슬픔을 남긴다.
할머니는 늘 소녀 같았다. 전화를 끊을 때면 늘 하이톤의 목소리로 ‘예원이, 사랑해’라고 말씀해 주시곤 하셨는데 그 ‘사랑해’는 다른 누군가에게 받은 그 어떤 ‘사랑해’보다 날 행복하게 했다. 나는 아마도, 했던 이야기를 매번 다른 이야기처럼 감칠맛 나게 하시는, ‘너도 참 대단하지만 그래도 내 딸이 더 대단하다’고 말씀하시며 웃으시는, ‘사랑해’라는 고백에 전혀 주저함이 없는, 헤어질 때면 행여 전달 타이밍을 놓칠세라 돈 오만 원을 손에 꼭 쥐고 있는,
그런, 나의 외할머니 같은 할머니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만날 때마다 세세한 생활의 팁을 전해주시곤 하셨는데 예를 들면 '걸어 다닐 때는 절대 주머니에 손 넣고 다니지 마라', '택시 내릴 때는 꼭 앉았던 자리를 확인해라' 등의 조언이었다. 그 문장들은 수차례 반복돼 마치 내 몸에 새겨진 것 같았다. 그런 종류의 조언을 귓등으로 듣고 금세 까먹는 나였지만 할머니의 조언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늘 택시에서 내릴 때 뒤를 돌아봤다.
할머니는 유난히 春을 좋아하고 걱정하셨는데 가끔은 내가 할머니 손녀인지, 春이 할머니 손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코로나로 베이징에 돌아가지 못할 때에도 할머니는 늘 혼자 지내는 春의 외로움을 걱정하셨다. 질투가 나지는 않았다. 春에 대한 할머니의 유난스러운 마음은 그만큼 내가 선택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할머니의 안목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할머니는 아직도 삶과 죽음의 경계 그 어딘가에서 사투를 벌이시고, 우리는 베이징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어느 순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이 야속하기도 하다. 나는 타국에서 할머니가 유일하게 가끔 드실 수 있다는 ‘죽’을 볼 때마다 할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모녀 4대가 한 번의 끼니를 같은 식탁에 앉아서 먹을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꿈을 많이 꾸는 나는 종종 나의 조부모님들이 나오는 꿈을 꾸곤 한다.
꿈속에서 나는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베이징 우리 집 1층에서 설레는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외할머니부터, 만나고 헤어질 때면 늘 동그랗게 나온 배가 느껴지게 나를 꼭 안아주셨던 외할아버지, 늘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시던 친할머니, 한 번도 뵌 적이 없어 사진 속 모습으로만 내게 남아계시는 친할아버지까지 낯선 타국에 있는 손녀의 집에 올라가기 위해 환한 햇살을 받으며,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내 곁에 서 계신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내게 완벽한 사랑을 전해주시며.
八宝粥 (빠바오저우/팔보죽)
음력 12월 8일 ‘납팔(腊八)절’에 먹는 죽, 중국인들이 아침으로 흔히 먹는다. ‘八宝’라는 이름은 ‘여덟 가지 보물’이라는 뜻이지만 찹쌀, 멥쌀, 땅콩, 대추, 밤, 팥, 호두, 녹두, 구기자 등 여러 가지 좋은 곡물 재료를 고아 만든 죽이다. 팥이 들어가 있어 달콤하다. 캔에 담겨서 판매될 만큼 인기 메뉴.
납팔절: 절인 마늘 등을 먹으며 풍년과 복을 기원하는 날, 석가의 성도(成道)를 축하하는 날이기도 하다.
#베이징에서_beijinger/생활여행자로_매일_열심히_걷고_먹고_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