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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Feb 02. 2021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정전기 강아지

포켓몬 같기도 하고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은 늘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어느 순간 평상시보다 조금은 차갑게 느껴진다거나 살랑이는 봄바람에 미묘한 위기감이 느껴져 급 다이어트를 결심한다거나 하는 것 말고도 강아지가 잠드는 자리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우리 집 강아지를 예로 들어보자면, 얜 사람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혼자 못하는 주제에 사람이 자기한테 치대는 것은 싫어해서 자기가 먼저 사람에게 다가와 부벼대는 일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로, 푹푹 찌는 여름이면 당연히 나와 멀리 떨어져 선풍기 바람이 은은하게(절대 직접적으로 바람을 맞지 않는다) 퍼지는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잠을 청하곤 하지만 겨울 추위 앞에선 인간과 살 부비며 잠들지 않겠다는 고고한 자존심 따위 개나 줘버리고 내가 덮고 있는 이불속으로, 따끈한 전기장판의 온기 속으로 사정없이 파고든다.



강아지와 함께 맞이한 첫겨울, 작은 얼굴로 이불을 들추고 들어와 내 허리춤에 자리 잡고 누운 강아지에게 쓸데없이 감동했었다. 나에 대한 강아지의 마음을 확인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강아지가 내가 이불속에 누워있지 않는데도 이불속으로 들어가 자는 것을 보고 대단한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이젠 강아지가 이불로 파고드는 것이 내가 난데없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그저 따듯한 곳에서 잠들고 싶은 것뿐인 일차원적이고 투명한 강아지의 의도를 알기에 더 이상 혼자 오두방정 떨며 어긋난 감동 따위 하지 않지만, 그래도 불러도 오지 않는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며 끝내 들은 채도 하지 않는 강아지의 뒷통수나 바라보다 잠드는 여름보다는 백배 낫다.      



내가 너무 강아지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강아지처럼 묘사해 혹 강아지가 스트릿 출신이거나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커서 아직 나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오해를 살까 봐 덧붙이자면, 우리 집 강아지는 본래 타고난 성격 자체가 이렇다. 그렇다고 진짜 대단히 차갑고 도도하고 그런 것은 아니고, 막 5살 된 꼬맹이가 4살 동생들을 보고는 나도 이제 엉아라며 단추도 제대로 못 끼우면서 직접 하겠다고 한사코 엄마 손길을 거부하는 그런 가소로운 자존심을 부리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겨울이면 미용을 거의 안 하긴 하지만 그래도 빗질도 싫어하는 애가 털이 너무 길다 싶을 땐 가위로 조금씩 잘라주곤 했는데, 이번 겨울엔 수의사쌤의 명령 아닌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지난겨울보다 1-2cm 긴 털 길이를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겨울을 덥수룩하게 보냈다면 이번 겨울은 거의 삽살개 급이다. 그로 인해 강아지는 요즘 담요 위에서 한 번만 뒹굴대도 정전기가 일어나 털들이 흡사 민들레 홀씨마냥 부풀어 오른다. 약간 복어 같기도 하고.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웃겨서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 한 명은 동영상을 몇 개나 찍어갔다. 사방으로 방방 뻗친 본인의 털이 강아지의 눈에 제대로 보일 리가 없으니 강아지는 그저 이 인간들이 단체로 왜 이래, 어이가 없을 뿐이다.      



강아지가 이불속으로 파고들 때도 마찬가지로 정전기가 일어난다. 담요만큼의 강력한 정전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귀여움에 말문이 막힐 만큼. 하지만 그 순간에 카메라를 들이밀며 시간을 쓰는 것은 사치다. 변덕이 들끓는 강아지가 덥다며 이불을 다시 박차고 나가기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최대 10분. 강아지가 제 발로 내 품 속으로(뭐, 이불 속으로가 맞는 표현이지만, 내 멋대로 해석하련다) 들어온 이 순간을 단 1초도 허비할 수 없다. 강아지 털에 얼굴을 파묻고 부드러운 뱃살을 쪼물딱 거리며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강아지가 누구냐고 주접을 떨기에도 아까운 시간이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겨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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