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20대 중반까지는 새해 목표니 다짐이니 하면서 1월 1일이면 무언가를 계획하고 그걸 지켜보려는 노력을 단 일주일이라도 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그깟 일주일 한다고 뭐가 바뀌겠냐, 연도가 바뀌었지 내가 바뀐 게 아니다, 그냥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날을 보내다가 억울하게도 한 살을 더 먹은 것뿐이다 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염세적인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은 그렇기 때문에 올해 1월 1일에도 그닥 계획이라고 할 만한 걸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새해를 맞이했다간 정신상태가 언제까지나 12월 어딘가에 머무르며 연말 기분에 취해 흥청망청 지낼 것 같아서 조금이나마 인간다워지고자 남들이 물어봤을 때 나도 계획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다 하는 시늉이라도 낼 수 있도록 듣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계획 2개를 골랐다. 계획을 세운 게 아니고 고른 것이기 때문에 지킬 마음은 크게 없었다.
1. 주 2회 채식하기 2. 술 줄이기(혼술 포함)
사실 2번, 술 줄이기만 하려고 했으나 이건 주위 사람들에게 내 새해 계획이 이렇다고 소개했을 때 역시~ 하는 반응이 나올 것 같아서 오? 하는 반응까지 끌어내 보고자 마음에도 없던 주 2회 채식을 끼워 넣었다. 주 2회 채식쯤이야 뭐, 평소 고기를 상당히 좋아하긴 하지만 안 먹으면 죽을 것 같은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가벼운 챌린지 정도가 될 거라 여기면서.
나는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할 때는 웬만하면 규정에 따르는 것을 좋아하고, 처리해야 할 업무를 미루는 일이란 없고, 업무가 잔뜩 쌓였을 때면 중요도에 따라 분류한 뒤 처리에 요하는 예상 시간을 계산하여 톱니바퀴 맞물리듯 계획에 맞게 착착 모든 업무를 끝마쳤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상당히 FM 스러우면서도 진취적인 스타일인데, 이게 내 개인의 일로 화살표가 향할 땐 180도 다른 인간이 된다. ‘그럴 수도 있지.’를 모토로,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기는 기본이고 해야 할 일을 당연스레 미루면서 봐, 오늘 안 했는데도 안 죽었잖아 하며 뿌듯해하기 일쑤다. 주 2회 채식도 같은 맥락에서 차일피일 미루었다. 1월 1일이 금요일이었던 탓에 아직 새해의 한 주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며 월요일이 될 때까지 미루었고, 비로소 월요일이 되었을 때는 아직 일주일이 6일이나 더 남았다며 미루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목요일이 되었고 금요일, 무려 금요일에 채식을 한다는 건 수많은 야식으로 점철되어온 내 지난 불금의 역사를 무너뜨리는 것과 다름없음에 역시 모든 계획은 월요일부터지 하며 가볍게 포기하려는데, 같이 저녁을 먹던 친구가 다짜고짜 새해 계획이 뭐냐고 묻는 것이다.
청진옥에서 해장국을 먹던 와중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추웠다. 뜨끈한 국물로 몸을 좀 녹여보려는데 갑자기 새해 계획이 뭐냐니. 어? 어, 주 2회 채식하는 거. 양과 선지가 듬뿍 든 해장국을 앞에 두고 대답했다. 예상대로 친구는 오? 하는 반응을 보였다. 덧붙여 벌써 목요일이니까 이번 주는 이미 했겠네? 한다. 친구야, 너 백수면서 요일에 상당히 밝구나. 친구는 별생각 없이 내 말에 호응한 것뿐인데 혼자 괜히 찔린 나머지 사실 아직 못했어. 아니, 김치만두를 먹어도 소에 고기가 있더라고. 쉽지 않다니까? 내일이랑 내일모레 꼭 할 거야 해버렸다. 친구는 금요일, 토요일에 채식을 하겠다니 대단한 결심이라며 나보고 멋지다고 했다. 나는 멋진 인간이기보다는 그냥 어쩔 수 없는 인간이고 싶은데 말이다. 영 자신이 없어 혹시 금토에 약속 없으면 너도 같이 할래? 하며 가만있는 친구의 발목을 잡았다. 친구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결심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리는 2일간의 채식에 앞서 마지막 육식이 될 해장국을 싹싹 먹어치웠다.
채식이라 하면 오로지 풀만 먹는 것인가. 언젠가 계란과 유제품까지는 허용하는 채식, 해산물까지는 허용하는 채식, 아예 풀만 먹는 얄짤없는 채식 등 채식에도 종류가 있다는 글을 읽었던 것 같다. 그때는 내 인생을 통틀어 관심 가질 일 없는 분야의 상식이라 생각해 지하철 내 옆에 앉은 아저씨가 무슨 색 넥타이핀을 했는지 대충 흘겨보는 정도의 관심, 다시 말해 손톱 끝의 때만큼의 관심도 갖지 않고 넘겼는데 막상 정말 채식을 하기로 하니 눈앞이 깜깜해 먹을 수 있는 옵션을 한 개라도 늘려보고자 채식에 대해 찾아보았다. 조바심에 눈이 멀어 아주 대충 얼렁뚱땅 찾아본 결과이니 자세한 것은 구글링 하시라.
채식의 7가지 단계
비건 : 오직 풀
락토 : 채소와 우유 및 유제품
오보 : 채소와 계란
락토 오보 : 채소, 우유 및 유제품, 계란
페스코 : 채소, 우유 및 유제품, 계란, 어패류
폴로 : 채소, 우유 및 유제품, 계란, 어패류, 닭고기
플랙시테리언 : 채식을 하지만 아주 가끔 육식을 겸함
찾아보니 꽤 흥미로웠다. 알고 보니 나는 그동안 꽤 자주 락토 오보 채식을 해온 것이 아닌가. 즐겨 만드는 음식이 오믈렛, 부추계란만두, 카레(귀찮아서 감자만 넣음), 버터 스콘, 알리오 올리오(마늘만 넣어 만들고 맨 마지막에 계란 노른자를 올리는 야매 레서피)인 것을 보면 말이다. 이거 뭐, 채식 까짓 거 식은 죽 먹기잖아? 친구에게 내가 알아본 정보를 공유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목요일 밤 잠자리에 들었다.
대망의 채식 첫날이 밝았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보다는 먹을 수 있는 음식에 제한이 생겼다는 것에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믈렛을 만들어 먹을까 하다가 오믈렛을 먹어봐야 포만감이 얼마나 된다고 굳이 귀찮게 해 먹나 싶어 점심을 걸렀다. 갑자기 감바스가 먹고 싶었다. 어패류까지 허용하는 페스코도 채식에 속하니 못 먹을 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류하자면 아무래도 난이도가 쉬운(?) 채식에 속하는 편이다 보니 첫 시작은 조금 빡세겠지만 도전하는 기분으로 오보 - 락토 오보 사이에서 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귀찮아서 귤이나 까먹었다. 한 5시쯤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뭐 먹었어? 메뉴 공유 좀
- 고구마만ㅋㅋ
나도 귤만ㅋㅋㅋ
채식을 하자고 해놓고 둘 다 영양실조식을 하고 있다. 우리의 무모한 채식 첫날은 팔자에 없던 채식에 도전하느라 메뉴 선정에 패닉이 오는 바람에 둘 다 의도치 않게 고구마, 귤만 먹으며 막을 내렸다. 다음 날, 오늘은 영양가도 좀 챙겨보자며 메뉴를 공유하기로 했다. 점심으로 나는 오믈렛을 해 먹었고 친구는 고구마와 채소볶음을 해 먹었다. 전날에 비하면 아주 큰 발전이지만 이런 식으로 먹다간 주 2회 채식하기라는 계획 역시 실패로 돌아간 수없이 많은 지난 새해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일주일 만에 때려치울 게 뻔했다. 계획이란 게 세우기만 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계획을 지속적으로 지켜 나가는 것,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가며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더욱 성장하는 것, 다시 말해 감바스가 먹고 싶었다는 것이다. 가늘고 긴 주 2회 채식을 위해 저녁으로 새우와 마늘을 잔뜩 넣고 감바스를 해 먹었다.
힘겹게 새해의 첫 주 2회 채식을 성공 후 나는 총 3주 더, 결과적으로 1월 한 달간 주 2회 간헐적 채식을 했다. 지난 30년 동안 육식 위주의 식단에 익숙해왔기에 채식을 하기로 정한 날이 순탄히 성공적으로 끝나지 않았던 적도 많았다. 술에 취해 나도 모르게 베이컨 조각을 집어 먹는 바람에 실패했던 날, 채식을 위해 귀찮지만 미역을 사 와 미역국을 끓였으나 무의식적으로 또 나도 모르게 쇠고기 다시다를 넣어 실패했던 날, 물냉면을 먹으며 이건 채식이겠지 해놓고 또또 나도 모르게 친구가 시킨 돈까스 한 조각을 먹어버린 날. 무의식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사실 한 달 동안 꼬박 채식을 한 것도 아니고 주 2회에 한정해 겨우 8일만 채식을 했을 뿐이기에 이렇다 할 몸의 변화는 아직 느끼지 못했다.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변화는 있었다. 예전보다 먹는 음식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것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육류를 섭취하지 않도록 주의하게 되었다는 것. 자취 9년 차, 유통기한이 며칠 심하게는 몇 주가 지난 식재료를 먹어도 큰 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에 식재료를 살 때 포장지 뒤에 기재된 성분표는 거의 읽어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칼로리 확인 정도. 지금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딱히 읽을 의향이 없던 성분표를 간헐적 채식을 시작한 뒤 참고해 읽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라면인 것처럼 채소 사진만 잔뜩 그려진, 이름도 채소만 들어간 라면인 것처럼 써 붙여있는 라면의 성분표에서 ‘쇠고기 함유’가 표기된 것을 발견해 실망한 것도, 친구와의 약속에서 굳이 들깨 수제비집에 가자고 제안한 것도, 들깨 수제비를 주문하면서 쇠고기 다시다가 들어가진 않는지 재차 확인한 것도 간헐적 채식을 시작하며 나타난 변화다.
생각해보면 새해 계획을 한 달씩이나 지킨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다지 지킬 생각도 없었는데. 이왕 한 달 해본 것, 2월에도 계속해서 해봐야겠다. 누가 알겠는가, 이 기세로 1년을 쭉 하게 될지. 당장 오늘 그 어떤 고기도 넣지 않고, 심지어 쇠고기 다시다도 넣지 못하고 멸치 액젓과 국간장으로 간을 해 미역국을 끓일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팍팍해지는 것 같지만 말이다.